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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부터 3년간 부산으로 고등학교를 다닌 김수룡(61, 교동) 씨 역시 빨간 버스로 통학하던 기억이 선명하다.
당시 양산에서 중학교를 졸업한 학생 중 10% 정도는 부산에 있는 고등학교로 진학했다. 흔들림이 심한 버스에 몸은 고됐지만 따뜻한 정(情)이 있었다.
학생들이 많지 않아 기사들이 얼굴을 알고 챙긴 것. 김 씨는 “버스 기사들은 타야 할 학생이 안 보이면 2~3분 기다렸다가 학생을 태우고 출발하기도 했어요. 혹여나 결석하게 되면 함께 타는 이웃집 승객들이 얘기를 전해 듣고 알려주곤 했죠”라며 당시를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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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에 상북 석계에서 양산중학교를 다닌 임승진(66, 상북면) 씨 역시 ‘12번’에 대한 추억이 많다.
“당시 버스 요금이 6원 정도 됐던 것 같아요. 비싼 편은 아니었지만 시골 가정에 돈이 많지가 않아서 매일 타진 않았어요. 또, 버스가 자주 다니지도 않았고요”
양산이 좋아졌다고 언제 느끼냐는 물음에 임 씨는 “배차 시간 간격이 줄어든 거죠. 양산의 중심을 지나는 황금노선임에도 예전에는 배차 간격이 한 시간 정도는 된 걸로 기억하거든요. 시간도 들쭉날쭉했으니까요”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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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언제나 빽빽했던 12번 버스에는 ‘깍쟁이’라 불렸던 소매치기도 있었다.
정진옥(81, 북부동) 씨는 “소매치기 하는 ‘깍쟁이’가 많았습니다. 2명이 짝을 이뤄 한 명이 가리고, 한 명이 물건을 훔쳤어요. 저도 두 번 당했고, 주위 사람들도 많이 당했죠”라고 떠올렸다.
정 씨는 결혼식에 참석하느라 부산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지갑을 통째 잃어버리기도 했다. 돈만 쏙 빼고 버스에 버리고 간 지갑을 돌려받은 적도 있다.
이처럼 ‘깍쟁이’들은 승객들이 돈을 두둑하게 들고 다닐 법한 시기에 주로 출몰했다. 설이나 추석을 앞둔 대목 장날이나 부산 등지로 가는 결혼식 하객들이 많이 타는 일요일이 대표적인 작업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