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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양산의 뿌리를 찾아서
호국의 얼 가득한 시민공원과 국개다리

양산시민신문 기자 입력 2012/09/11 15:02 수정 2012.09.13 03:26
유적(지명)으로 보는 향토사 ⑥ 춘추원(春秋園)과 영대교(永代橋)





↑↑ 2009년 재가설된 영대교 모습. 분수대, 천상구름다리 등과 어우러져 아름다운 모습을 연출하고 있다.
태백산 줄기를 타고 뻗어 내린 산 능선이 영축산에서 남쪽으로 내려오다 교동 마고성에서 동쪽으로 머리를 돌려 마치 한 마리의 학이 날개를 펴고 양산천으로 내려오는 모습을 하고 있다.

그 머리 부분이 춘추원이고 그 봉우리를 백로봉(白鷺峰)이라 했으며 봉우리 이름이 새겨진 기둥이 지금도 박혀있다. 옛날 백로 무리가 소나무 위에 많이 서식하였으리라.

춘추계가 주관한 삼조의열 제향

1945년 해방이 되자 뜻있는 사람들이 모여 춘추계를 조직하였다. 춘추계는 관공서와 시민단체의 협조를 얻어 읍내에 방치되어있는 신라 삽량주 간(干) 박제상 공의 비(碑)와 고려 양주방어사 김원현 공의 비(碑), 그리고 조선 임진왜란 때 양산군수 조영규 공의 비(碑)를 이곳에 옮겨 삼조의열단을 조성하고 그 단(壇)의 이름을 장충단(將忠壇)이라 하였다.

신라 박제상공은 눌지왕(418년) 때 왜국에 불모로 있는 왕의 아우 미사흔을 구출하고 그 곳에서 모진 고문을 받다가 순직한 분이고, 고려 김원현 공은 왜적이 많이 침략하던 충렬왕 때 양주방어사로 있으면서 낙동강에서 왜병 수천명과 싸워 적을 물리치고 양산을 지킨 분이다.

조영규는 조선 선조 25년(1572년) 임진왜란 때 양산군수로 있으면서 동래성으로 가서 송상현 동래부사와 함께 왜적과 싸우다가 장렬히 전사한 분이시다.

시민들은 이 세 분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신 분으로 널리 추앙하며 충렬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춘추원(春秋園), 장충단(將忠檀), 삼조의열(三朝義烈), 만년춘추(萬年春秋)등의 석주를 세우고 또 용두산 공원에 있던 해태상 등 조형물을 배치하여 명실상부한 공원으로 만들었다.

이때부터 춘추계원이 주관하고 향교에서 협조하여 양산시장이 헌관이 되어 매년 봄에 엄숙하게 제향을 올리고 있으며 공원의 이름을 춘추원이라 했다. 춘추는 봄과 가을에 제향을 지내면서 이분들을 생각하고 매년 변함없이 돌아오니 영원히 이어져라는 의미다.

↑↑ 삼조의열과 임란공신, 항일독립유공자 70위의 위패를 모신 충렬사가 준공돼 공개를 앞두고 있다.
충렬 비석과 현충탑 건립


1919년 상해임시정부의 재무차장을 지내면서 독립운동을 한 윤현진 선생의 기념비가 1959년 4월 15일에 ‘대한국사윤현진기념비’라는 이름으로 춘추원 안에 세워졌고, 1971년 4월에 임란공신이신 안근의 비(碑)가 세워졌다.

1968년 백로봉 아래에 충혼탑을 세우고 봉안각을 지어 양산출신으로 6.25전쟁에서 전사한 전몰군경 769위의 위패를 봉안하고 매년 현충일에 추모행사를 하고 있다가 2006년에 탑을 중수하고 명칭도 현충탑으로 바꾸어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친 선열들의 혼을 위로하고 있다.

충렬사 건립의 의의

양산의 삼조의열, 임란공신, 항일독립운동유공자들에 대하여 조금은 무질서하게 모셔져 있는 감이 있었다.

즉 삼조의열의 장충단이 현충탑보다 아래에 위치하고 있는 점, 임란공신들의 위패가 각 문중별로 따로 모시고 있는 점, 또 항일독립운동유공자들은 후손이 없어 그 위패마저 없는 사람도 있다는 점 등 이런 것들을 감안할 때 종합적인 추모시설인 충렬사를 새로 지어 모두 함께 봉안하는 것이 합당하다는 의견을 모아졌다.

시의 충렬사 조성계획에 따라 백로봉 위쪽에 5천573㎡면적을 확보하여 삼조의열 3위, 임란공신 28위, 항일독립운동유공자 39위 모두 70위의 위패를 봉안하고 춘추만년으로 제향행사를 이어갈 계획이다. 건물은 금년 8월 말에 준공하였고 9월에 위패봉안식을 할 것이다. 그러면 춘추원이 양산인의 얼이 깃든 충렬공원이 될 것이다.

↑↑ 춘추원 충혼탑 뒤에 있는 ‘백로봉’ 돌기둥.
국개다리로 불렸던 곡포교


옛날부터 교리에서 양산읍내로 가는 큰 교량이 놓여져 있었다. 교리의 옛 지명이 곡포(曲浦)이었다.

1935년에 발행된 『조선환여승람』이라는 고서의 양산군 산천 조에 구읍포(仇邑浦)를 설명하면서 그 내용이 ‘지금의 곡포(曲浦)이다. 고을 서쪽 3리에 있고 근원은 취서산(영축산)과 원적산(천성산)에서 나와 물줄기를 합하여 황산강(지금의 낙동강)으로 흘러간다. 당나라의 곡강(曲江)에 의춘화(宜春化)가 있었다. 그런데 옛날 이 고을을 의춘(宜春)이라고 불렀다. 그래서 지금 고쳐서 곡강(曲江)이라고 한다’고 되어 있다.

즉 옛날 구읍포(仇邑浦)라고 하다가 지금은 곡포(曲浦)라고 한다는 것이다.

또 1469년에 발행된 『경상도속찬지리지』에 보면 ‘구읍포의 대천교에는 행인을 등에 업고 건너주는 월천(越川)꾼을 상시 배치하였다’라는 내용이 있고, 또 다른 문헌에는 ‘매양 큰물에 휩쓸려 유실되어 군민들이 동원되어 유실 때마다 보수하니 폐단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래서 1694년 당시 군수가 의연금을 모으고 석교(石橋)를 가설하려고 하였으나 흉년이 들어 미루어오다가 결국 공사를 이루지 못하였다’고 하였다.

교동이라는 마을이 당초에는 곡포리(曲浦里)였던 것이 1828년에 향교가 이곳에 온 이후부터 교동(校洞)으로 지명이 바뀐 것이다.

정리하면 춘추원 산 주변의 포구가 옛날에는 S자 모양으로 옴팍하게 들어갔다 나오는 형상을 하고 있어 이곳 지명이 곡포였고 곡포에서 읍내까지 큰 나무다리가 있었는데 그 다리 이름이 곡포교(曲浦橋)이고 다리가 위험해서 업고 건너주는 사람이 항상 대기하고 있었다는 내용이다.

명물로 거듭 태어난 영대교

곡포교(曲浦橋)를 한자로 풀어보면 포(浦)는 개 포자로 물가를 뜻하고 교(橋)는 다리 교로 풀어쓰면 곡개다리가 된다. 이것이 후일 국개다리로 변화된 것이다.

또 다른 주장은 곡포교라는 발음이 어려워서 줄여서 곡교라 했고 곡교가 국교가 되고 국교가 국개로 변한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어쨌거나 곡포교가 국개다리인 것이다.

우리가 어릴 때 어머니나 형들이 다리 밑에서 주워왔다는 바람에 국개다리만 보면 내가 혹시 이 다리 밑에서 주워왔는가? 또 다른 어린이가 흘러있는지 유심히 살피던 기억이 난다.

 
↑↑ 정동찬
양산향토사연구소장
 
일제강점기에는 통나무교각위에 흙과 자갈을 덮어 도로를 만들어 자동차가 다녔다. 광복 이후 1949년 3월에 나무다리를 철거하고 콘크리트로 교량을 다시 만들어 이름을 영대교(永代橋)라 하였다.

국개다리에서 영대교로 바뀐 것이다. 그 후 영대교가 재해를 입는 등 다리가 부실하여 1983년에 재가설하였고, 신도시 건설로 교통량이 증가함에 따라 2009년 6차선으로 재가설한 것이 지금의 영대교이다. 다리의 크기도 모양도 매우 현대적이고 야경이 아름다워 양산의 명물로 재탄생하였다.

자료출처 : 양산읍사 2009 / 읍사편찬위원회
    양산사료총람 2006 / 양산향토사연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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