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언제고 지나치는 길가에 한 그루 남아 선 노송(老松)있어 바람 있음을 조금도 깨달을 수 없는 날씨에도 아무렇게나 뻗어 높이 치어든 그 검은 가지는 추추히 탄식하듯 울고 있어, 내 항상 그 아래 한때를 머물러 아득히 생각을 그 소리 따라 천애(天涯)에 노닐기를, 즐겨 하였거니, 하룻날 다시 와서 그 나무 무참히도 베어 넘겨졌음을 보았나니.
진실로 현실은 한 그루 나무 그늘을 길가에 세워 바람에 울리느니 보다 빠개어 육신의 더움을 취함에 미치치 못하거늘, 내 애석하여 그가 섰던 자리에 서서 팔을 높이 허공에 올려 보았으나. 그러나 나의 손 바닥에 그 유현(幽玄)한 솔바람 소리 생길 리 있으랴.
그러나 나의 머리 위 저 묘막한 천공에 시방도 오고 가는 신운(神韻)이 없음이 아닐지니. 오직 그를 증거할 선한 나무 없음을 안타까울 따름이니라.
- 유치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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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순아 시인 한국문인협회 양산지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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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적 화자는 <바람 있음을 조금도 깨달을 수 없는 날씨에>도 노송 가지의 떨림을 통해 바람의 존재를 느끼고 그 소리를 따라 자연을 즐기곤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노송이 베어져 있음을 보게 됩니다.
시인은 나무를 길가에 세워 두는 것보다 잘라 내고 <빠개어 육신>을 데우는 땔감으로 쓰는 것이 더 유용하다는 나무의 기능적 가치를 인정하고 있습니다만, 노송의 죽음에 대한 어쩔 수 없는 안타까움을 보여주고 있군요. 시인은 노송처럼 허공에 팔을 높이 들어 바람에 떨리는 소리가 들리기를 기대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한 일. 그래서 시인은 상상합니다. 지금도 천공을 오고가는 신운, 즉 자연과의 교감할 수 있을 거라고. 그래서 그것을 증거물로 보여줄 수 없는 현실을 안타까워하고 있습니다.
아파트 화단에서, 길가에서, 공원에서, 어디서나 볼 수 있고 만날 수 있는 나무(자연)! 우리도 시인처럼 이렇게 나무와 대화할 수 있을까요? 자연 속에서 자라고, 자연을 통해 꿈을 키우던, 그런 순수함이 점차 사라져 가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게 여겨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