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나는 우연히 그곳을 지나게 되었다
눈은 퍼부었고 거리는 캄캄했다
움직이지 못하는 건물들은 눈을 뒤집어쓰고
희고 거대한 서류뭉치로 변해갔다
무슨 관공서였는데 희미한 불빛이 새어나왔다
유리창 너머 한 사내가 보였다
그 춥고 큰 방에서 書記는 혼자 울고 있었다!
눈은 퍼부었고 내 뒤에는 아무도 없었다
침묵을 달아나지 못하게 하느라 나는 거의 고통스러웠다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중지시킬 수 없었다
나는 그가 울음을 그칠 때까지 창밖에서 떠나지 못했다
그리고 나는 우연히 지금 그를 떠올리게 되었다
밤은 깊고 텅 빈 사무실 창밖으로 눈이 퍼붓는다
나는 그 사내를 어리석은 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 기형도 <2012학년도 10월 전국연합학력평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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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순아 시인 한국문인협회 양산지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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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지금 그를 떠올리>는 시인은 그때 본 그 사내의 모습과 자신이 다르지 않다는 것을 느낍니다. <밤은 깊고> <눈이 퍼붓는>겨울, <텅빈 사무실>에 혼자 남아 어깨를 들썩이는 사내들이 우리를 겨울 쪽으로 질질질 끌고 갑니다.
숱한 시간 속에서 변주되는 무수한 삶과 아픔. 상처와 시련을 모르는 사람은 보고도 모르고 알 수도 없는, 그런 세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