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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양산의 뿌리를 찾아서
역사와 함께 고난을 이겨 온 양산의 허파, 배내골

양산시민신문 기자 입력 2012/10/16 14:24 수정 2012.10.24 03:36
유적(지명)으로 보는 향토사 ⑦ 배내골과 밀양댐






배내는 순 우리말이다. 특이하게도 우리말 지명이 한문으로 변화된 곳이다. 배내 전체를 일러 원동면 이천리(梨川里)라고 했다. 즉, 배 이(梨)자와 내 천(川)을 쓴다.

본래 이곳 지명은 선천(船川)이었다. 배 선(船)자와 내 천(川)을 사용했다. 1638년 양산군수 이만도가 쓴 고려양주방어사 김원현의 비문 내용을 보면 배내를 선천(船川)이라고 표현했다. 또 이곳에서 오래 살았던 문중의 족보를 보면 묘지가 있는 곳의 지명을 장선(莊船)이라고 표기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곳 지형이 배와 관련이 있다. 지형이 배 모양으로 생겼기 때문에 배내라고 했던 것 같다.

실제 이곳 마을사람들은 우물을 파지 않았다. 우물을 파는 행위는 배의 밑바닥을 파는 행위로 배가 가라앉기 때문에 마을이 망한다는 속설 때문이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지명에서 배 선(船)자가 빠지고 배 이(梨)자가 되었다.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어느 날 밀양부사가 이곳을 지나면서 물을 마셨는데 그 맛이 마치 배 물을 마시는 것 같다고 해서 이천(梨川)이라 했다고 한다. 배내는 이십리에 뻗은 긴 협곡으로 아랫부분은 양산 배내로 양산시 원동면 이천리(대리, 선리)에 해당되고 위쪽은 울주 배내로 울주군 상북면 이천리에 속한다.

소용돌이 치는 역사의 희생

1592년 임진왜란으로 나라가 혼란스러울 때 사람들이 난을 피해서 이곳에 숨어 들어와 살게 된 것이 계기가 되어 촌락을 이루었다고 한다. 그러나 1945년 해방이 된 후에 수난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남한에서 활동하던 좌익사상을 가진 사람들이 점점 밀려 산속으로 숨어들면서 소위 빨치산으로 활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경남 동부지구 빨치산의 아지트가 지금의 울주군에서 배내로 가는 신불산 속에 있었다. 이들은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하여 밤낮없이 마을로 내려와 금품을 탈취해갔다.

더욱이 1948년 남한단독정부수립 이후에는 이들의 간악한 행동이 더욱 노골화되어 마을로 내려와 지역유지등 그들의 비위에 거슬리는 자는 마을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무참히 살해하는 등 만행을 저질렀다. 그것은 마을 사람들이 그들의 말을 잘 듣도록 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 군사도로를 개설해 준 서종철 참모총장 공덕비
당시 이곳 배내에는 치안이 매우 위태로웠다. 빨치산 공비들이 낮에도 할보하고 다니면서 마을 사람들을 회유, 협박, 살해 행위가 자행되었다. 경찰에서는 1949년 4월에 배내주민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선리초등학교에 임시지서를 개설하고 경찰 27명을 배치하여 근무하게 했다.

그러다가 그해 8월에 공비로부터 습격을 당하여 경찰관 10명과 민간인 2명이 순직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 사건 이후 양산경찰서의 공비토벌대와 반공우익단체인 서북청년단이 함께 출동하여 배내주민과 공비가 내통한 자가 있다고 짐작하고 마을을 전부 불태워버렸다.

이로 인해 배내사람들은 인근 양산, 밀양, 언양지역으로 뿔뿔이 흩어졌다가 1951년에 일부 사람들이 다시 고향을 찾았고 고향에 가지 않은 사람들은 그냥 피난 갔던 곳에서 눌러 살고 있다.

원동과 버스가 운행되고

배내는 교통이 불편하여 오지를 면치 못했다. 실제로 어린이가 급성맹장염에 걸려 병원이 있는 원동까지 걸어 나오면서 목숨을 잃은 일도 있었다. 1963년 이곳에 출장소를 설치하여 행정편의를 도모하는데 출장소 소장이 주민들의 민원을 취합하여 일주일에 한 번 면사무소에 가서 처리하곤 했다. 원동에서 배내까지 도로가 좋지 않아 차량이 다니기가 어렵고 또 버스가 다니기는 매우 위험하였다.

1971년 우리고장 출신 서종철 씨가 참모총장으로 있으면서 군사작전도로 개설사업을 추진해 이곳 배내고개를 넘는 길을 넓게 확장했다. 그 고마운 뜻을 원동이장단의 이름으로 배내고개에 돌비석을 세워 그 뜻을 새겨놓았다. 이후 차량이 쉽게 통행하게 되면서 처음 버스가 운행하게 된 것은 1977년도가 지나면서부터였다.

청정 피서휴양지로 각광

사람들의 생활이 점차적으로 나아지면서 때 묻지 않은 이곳 청정지역을 찾는 손님이 점차적으로 많아졌다. 여름철이면 인근에서 구름처럼 몰려왔다. 1987년도에는 이곳을 자연발생 유원지로 지정하여 마을입구에서 쓰레기봉투 값으로 돈을 받고 입장시켜주었다. 부작용도 많았지만 버리고 간 쓰레기를 정리하여 환경을 보존하는 데는 크게 기여하였다.

이후에도 휴양객은 감당하기 어렵도록 많이 찾아왔다. 그냥 오는 것이 아니고 먹을 것을 차에 싣고 와서 먹고 남는 것을 모두 버리고 떠나면 나머지 쓰레기들을 배내주민들이 처리해야 했다. 수난의 시대가 또 찾아온 것이다.

그러나 배내청년들은 배내를 지켜내야 겠다는 애향심 하나로 견뎌온 것이다. 배내는 항상 물이 맑고 산이 수려하여 언제 가서 보아도 정감이 가고 깨끗함을 자랑한다. 그래서 2000년 6월에 양산시에서 가장 경치 좋은 곳 8곳을 선정하는데 그 중 하나로 꼽혔다. 즉, 양산팔경에 포함된 것이다.

↑↑ 가을단풍이 아름다운 밀양댐 전경
상수원보호구역으로 규제


1991년 수자원공사에서 밀양, 창녕, 양산 주민에게 양질의 식수를 제공하기 위하여 댐 설치공사를 시작했다. 그 댐의 이름을 밀양이라는 ‘밀’자와 양산이라는 ‘양’자를 합해 밀양댐이라고 하였다.

밀양댐을 막고 나서 이곳의 수질보호를 위해 2000년 11월 10일 상수원 보호구역으로 지정하고 배내천에서의 물놀이나 음식물을 조리하는 행위를 금지하기 시작하였다.

상수원보호구역 지정으로 주민들은 생활의 규제를 많이 받게 되고 찾아오는 관광객의 숫자도 줄게 되어 생계에 위협을 느끼게 되자 이곳 주민의 삶을 위해 펜션, 음식점 등을 할 수 있도록 주택과 근린생활시설 신축을 대량 허용하여 펜션시설이 늘어나게 되었고, 장선마을은 농촌문화체험마을로 지정돼 관광객의 유치를 유도함으로써 주민의 삶이 점차 나아지기 시작하였고 환경은 다시 청정지역으로 되었다.

근교관광지로 탈바꿈

지금의 배내는 그 풍광이 유럽의 어느 지역을 보는 것 같다. 집들의 구조도 그렇고 주변의 풍광도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맑은 배내천 물 주변의 어우러진 나무들, 맑은 공기 모두가 일품이다. 또 요즘은 배내사과가 유명하다. 이 지역사람들이 생존을 위해서 봄에는 고로쇠 물, 가을에는 배냇골사과를 특산화했다. 가을에 가면 붉은 사과가 주렁주렁 달린 사과밭이 장관이다.

 
↑↑ 정동찬
양산향토사연구소장
 
매년 2, 3월에는 고로쇠 축제, 11월 초에는 사과축제가 열린다. 길도 사방팔방 뚫려있다. 울주 언양에서 들어가는 길도 있고, 양산 어곡 신불산을 넘어가는 길도 있고, 원동으로 가서 배태고개를 넘는 길도 있다. 밀양이나 청도에서는 밀양댐을 따라 배내로 올 수도 있다.

장선마을 앞의 송림은 여름에는 시원한 유원지로서 주변경치가 매우 좋다. 근처에는 허브농장이 있어 더욱 향기롭다. 육지에 떠 있는 배가 오래도록 안정하기를 바랄 뿐이다.

자료: 원동면지 2008/원동면지편찬위원회
양산읍지 2009/양산읍지편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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