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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성악가 엄정행 양산시민대상 수상
목련화 한 송이 피우기까지… 엄정행의 반 세기 음악 인생

노미란 기자 yes_miran@ysnews.co.kr 입력 2012/10/30 15:10 수정 2012.10.30 03:10
배구선수에서 성악가로 뒤바뀐 운명

대학 적응 힘들어 1년간 방황하기도

외국 유학 없이 국민 성악가 자리매김

교수 퇴임 후 양산 문화 발전에 기




‘국민 성악가’, ‘가곡의 선구자’로 불리는 성악가 엄정행.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라는 어느 시(詩) 구절처럼 그의 음악 인생은 평탄치 않았다.

음악교사 아버지 밑에서 배구선수를 꿈꿨고, 성악과에 진학한 뒤로도 방황은 이어졌다. 그럼에도 성악가의 길을 스스로 개척해 자신만의 ‘목련화’를 피웠다. 그는 이제 고향땅 양산에 돌아와 또 다른 길을 만들어가고 있다.

배구선수가 되고 싶었던 소년

엄정행은 어린 시절을 외조부댁이 있던 상북면 소토리에서 보낸 후 초등학교에 들어가면서 아버지의 고향인 북부동으로 옮겨왔다. 양산중학교에서 음악교사로 교편을 잡았던 아버지 덕분에 어린 시절부터 클래식을 쉽게 접할 수 있었고, 또래들이 동요를 부를 때 가곡을 흥얼거렸다. 아버지 엄영섭 선생은 나중에 양산교육장으로 봉직하게 된다.

하지만 성악가의 운명이 처음부터 찾아온 것은 아니었다. 양산초등학교 2학년이던 1950년, 6.25 전쟁으로 당시 양산지역에는 군인들이 주둔했고, 학교 사택이던 엄정행의 집 옆에는 백골부대 부대원들이 살았다.

한 번은 한 사병이 부엌 아궁이에서 불을 지피는데 불을 쬐던 엄정행의 다리에 불길이 옮겨붙었다. 심한 화상으로 거의 1년을 누워지내야 했던 엄정행에게 아버지는 매일같이 음악을 들려주었다, 특히 베토벤을.

다리 회복을 위해 운동을 시작하면서, 따르던 음악선생이 지도하는 배구부에 들었다. 개천예술제 음악경연에서 큰 상을 탔음에도 운동에 전념했다. 배구 특기생으로 부산 동래고등학교에 입학했으며, 경희대 체육과를 목표로 배구선수의 길을 준비했다.

하지만 뜻밖의 벽이 그를 가로막았다. 신장 174㎝로는 배구 특기생이 될 수 없었던 것. 잘 할 수 있는 것은 음악밖에 없다고 생각한 그는 같은 대학 성악과로 방향을 틀었다. 

↑↑ 고향 양산으로 돌아와 지속적으로 독창회를 열고 있는 엄정행
방황 끝에서 첫 독창회 열기까지


우여곡절 끝에 1961년 봄 성악과에 입학했다. 목소리가 좋으면 문제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음악 기초지식이 없었던 터라 대학생활은 고달팠다. 배구에 미련도 남았다. 음악실보다 배구부 연습장을 기웃거리며 시간을 때우기 일쑤였다.

1년간 방황 끝에 기회가 다시 왔다. 2학년 때 이탈리아 연수를 마치고 귀국한 홍진표 교수를 만난 것이다. 처음 연구실에 가서 레슨을 청하던 날 홍 교수 앞에서 부른 노래가 이태리 곡 ‘거짓말’이었다. 목소리가 좋고 운동으로 다진 체격도 있으니 최고에 도전해 보라는 홍 교수의 격려로 새로운 목표를 정해 나갈 수 있게 됐다.

모든 학생들이 사사하고 싶어하는 홍 교수에게 개인지도를 받으면서 성악에 새롭게 눈뜨기 시작했다. 개천예술제 성악부 특상, 전국대학생콩쿠르 1등상 등을 거머쥐며 촉망을 받았다. 하지만 성악가의 길은 여전히 힘들었다. 대학원까지 마친 스물 여섯 풋내기 성악가에게 일자리는 없었다.

그래서 스스로 첫 독창회를 열기로 결정했다. 준비는 만만찮았다. 후원하려는 이도 드물었다. 그럴수록 오기가 생겼다. 일일이 사람들을 만나며 공연을 준비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했던가. 명동 국립 예술극장에서 열린 첫 독창회는 성공적으로 끝이 났다.

열정으로 오른 ‘국민 성악가’

그의 열정은 독창회뿐이 아니었다. 

1972년 가곡 ‘비목’의 장일남 작곡가가 MBC FM에서 가곡 앨범을 제작한다는 소식에 직접 찾아가 녹음  의사를 밝혔던 것. 청년의 열정을 알아본 걸까. 장일남 작곡가는 승낙했고, 12곡 녹음도 무사히 마쳤다.

그 녹음 테이프를 쥐고 레코드사 문을 두드렸다. 스테레오 음반을 제작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음반계는 가곡에 대한 인식이 낮은 데다 SP레코드판이 일반적이었다. 그런 상황에 ‘엄정행 스테레오 독창집’이 나오자 방송을 타면서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2년 뒤 선보인 명곡 ‘목련화’ 역시 고쳐 부르기를 수십 차례 반복한 끝에 탄생했다. 1979년부터 10년간은 MBC FM ‘안녕하십니까, 엄정행입니다’프로그램을 진행했다. 클래식 방송인 만큼 하루 2시간 이상 음악을 들으며 공부해 클래식 음악 대중화를 이끈 방송인로도 이름을 알렸다.

↑↑ 음악연구소를 설립하고 합창단을 지원하는 등 양산 음악발전을 위한 엄정행의 노력은 계속되고 있다.
순수 국내파로 가곡 대중화에 기여


국민적 사랑을 받는 성악가로 자리 잡았지만 유학 고민은 항상 따라다녔다. 성공하려면 외국에서 공부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이에 1981년 순회공연차 미국을 방문했을 때 현지서 만난 오페라 지휘자에게 조언을 구했고, 고민은 단박에 접었다.

오페라는 서양 고유의 음악으로 동양인 체형으로는 완전한 인물 표현이 힘든 데다 좋은 노래는 가창력보다 노래의 정서와 사상을 표현하는 것인 만큼 한국 문화가 녹아있는 가곡을 불렀으면 한다는 조언 때문이었다.

가곡의 아름다움을 전하기로 결심하면서 엄정행은 세종문화회관부터 시골 마을까지 전국을 누비며 가곡 무대에 올랐다. 또 모교인 경희대 성악과 교수로 34년간 제자 양성에 힘썼다.

엄정행성악콩쿨과 고향 양산

2008년 2월, 경희대 교수 생활을 마감하고 돌아온 곳은 다름 아닌 고향 양산. 국민적 스타였던 그가 고향으로 돌아온 데는 양산의 음악인재를 길러내겠다는 꿈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딴 ‘엄정행성악콩쿨’을 올해로 10회째 개최하는가 하면, ‘(사)엄정행 음악 연구소’를 설립하고 인재를 키우기 위해 장학금을 전달하고 있다. 또 연우합창단을 조직해 정기 공연을 열도록 지원한다.

이제 남은 꿈은 문화 자산을 후손 에게 물려주는 것이다. 그 중 하나가 책과 음반 등 자료를 전시하고, 공연할 수 있는 복합문화공간이다. 성악전공생은 물론 시민들과 나누겠다는 뜻이다. 엄정행 선생은 “양산은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도시다. 하지만 문화적 토양은 여전히 빈약하다. 내가 문화적 토양을 다지는 데 보탬이 될 수 있었으면 한다”고 밝혔다.

[엄정행 약력]

1943년 양산 출생

1961년 경희대 음악대학 성악과 입학

1972년 첫 음반 취입

1974년 ‘목련화’ 발표

1974년 경희대 음악대학 성악과 교수 임용

1979~1989년 MBC FM ‘안녕하십니까 엄정행’ 진행

2003년 제1회 엄정행성악콩쿨 개최

2008년 경희대 음악대학 학장으로 정년 퇴임

2008년 엄정행 음악연구소 설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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