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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병호 남강 역리연구원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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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균은 추일서정에서 <… 자욱한 풀벌레 소리 발길로 차며 / 호올로 황량(荒凉)한 생각 버릴 곳 없어 / 허공에 띄우는 돌팔매 하나 / 기울어진 풍경의 장막(帳幕) 저쪽에 / 고독한 반원(半圓)을 긋고 잠기어 간다>며 가을의 서정을 노래했다.
해마다 이맘때가 되면 젊어 떠나온 고향도 생각하며 절로 쓸쓸한 마음이 일기도 하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그래서 가을은 고독의 계절이다. 하지만 사춘기 청소년도 아니고 고독은 괜스레 오지 않는다. 결국 고단한 인생 여로, 나를 알아주지 않는 세상에 대한 좌절의 쓰라린 심정이 떨어지는 낙엽에 투사되어 나타날 뿐.
명리학에서 봄은 목 기운이 강해 발산과 성장의 시기로 해석하지만 가을은 금 기운이 왕하니 수렴과 결실의 시기로 본다. 결실을 맺기 위해서는 일정기간 에너지를 내면으로 수렴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추석 직전, 5대 일간지는 자존심 하나로 정치인생 역정을 걸어온 얼음공주 박근혜의 고개 숙여 사과하는 사진을 1면 톱으로 다루었다.
사과에 따른 정치적 득실을 생각하기 앞서, 사과를 요구하는 세상의 면전에 나아가 아버지의 역사에 관해 과오를 인정해야하는 행위, 차마 자식으로서 하기 힘든 일이다. 참담한 마음으로 고독한 결정을 내렸을 것이다. 최근 ‘강남스타일’로 세계적인 스타덤에 오른 싸이 또한 고독한 시절이 있었다. 병역문제로 세인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며 군 복무를 다시 받아들여야 했던 순간, 얼마나 번민하고 회의했을까?
공자 또한 ‘덕불고 필유린(德不孤 必有隣)’이라며 자신의 심경을 달랬으니 한 꺼풀 벗겨보면 인간은 처지만 달랐지 저마다 망망대해에 홀로 떠 있는 외로운 섬이다.
위 구절을 문자대로 해석하면 “덕이 있는 자 고독하지 않고 반드시 이웃이 있다”는 뜻이지만 사실, 여기서 덕이란 저속함의 반대, 고상함으로도 해석 가능하다. 즉 고상하면 처음엔 사람들이 경원해 고독하더라도 결국 진가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생긴다는 의미다.
그렇다 결국 고독도 깊어지면 길은 양 갈래다. 고독을 배수진 삼아 덕(고상함)을 길러 세인의 흠모를 받는 경우와 스스로 세상과 담을 쌓고 고독의 심연에서 황폐해지며 스러지는 유형, 이 두 가지로 나뉜다. 공자는 이 점을 간파하고 우리에게 고상함에서 고독을 이겨내는 힘을 얻어야한다고 역설하고 있다.
<귀거래사>로 유명한 중국의 유명한 시인 도연명은 그의 시 <음주>에서 ‘채국동리하 유연견남산(采菊東籬下 悠然見南山, 동쪽 담 아래 핀 한 송이 국화를 꺾어 들고 무심히 남산을 바라본다)’라며 벼슬에서 낙향한 심정을 가을의 국화에 비유하여 응수하고 있다. 일견 유유자적 자연친화적인 선비의 마음이 주제이건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왜 하필 국화였을까?
도연명의 국화는 예사롭지 않다. 늦가을 무서리에 모든 화초들이 꽃잎을 떨어뜨리며 계절과 이별할 때, 홀로 피어나 고상함을 향기로 성큼 다가온 추위와 맞대결하는 황국, 어찌 보면 자연의 이치에 역행하는 배반의 행위이다. 하지만 옛 선비들은 국화를 가인이라며 아끼고 가꾸었으니 고독을 이겨내는 인간 정신의 승리를 국화에서 찾으려 했던 것 같다.
남들이 가지 않는 길, 무리 짓지 않는 고상함은 개성이 되고 개성은 바로 창의성으로 귀결된다. 그 개성이 세계로 꽃 피어난 것이 바로 싸이의 강남 스타일이지 않은가. 고독과 우수에 바바리코트 깃을 세우는 것도 멋스런 계절 감각이다. 하지만 싸이의 노래말처럼 ‘근육보다는 사상이 울퉁불퉁하고 때가 되면 완전히 미쳐버릴 줄 아는’ 개성 또한 국화꽃의 배반에서 읽을 줄 안다면 정녕 멋진 강남스타일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