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 노봉석 양산중학교 교사 | ||
ⓒ |
하지만 누군가를 가르친다는 일은 늘 두렵고 버거운 일이다. 그전에 무엇을 가르쳐야 하는지조차 막막할 따름이다. 특히 상대방이 한창 예민한 사춘기 아이들이라면, 그래서 내가 하는 말 한마디 행동 하나 하나가 아이들의 기억 속에 각인될 것을 생각하면 더 그렇다.
하지만 5배속으로 보는 것처럼 바쁘게 돌아가는 학교의 일상 속에서 이런 고상한 생각을 유지하기는 지극히 힘든 일이다. 내가 해내야 할 다양한 ‘역할’들을 연기하다보면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야? 하는 회의가 밀려 올 때가 많다.
나는 다양한 모습으로 학생들 앞에 선다. 10개나 되는 학급에서 똑같은 진도를 나가다 보면 토시 하나 안 틀리고 같은 말을 반복하는 약장사가 되어 있다.
교실 유리창을 깨 놓고 짐짓 모르쇠로 일관하는 아이들을 다그쳐 범인(?)을 잡아 놓고는 교무실에서 의기양양하게 떠벌이거나, 주먹다짐을 한 아이들을 불러놓고 잘잘못을 가리고 벌을 세우다 보면 어느덧 나는 노련한 강력반 형사로 빙의해 있다.
점심 먹고 축구 한 판 하고나서 땀을 줄줄 흘리면서 연신 부채질을 해 대는 5교시 아이들, 5분 쯤 지나면 선생 빼곤 모든 것이 졸고 있는 그 교실에서 버럭 소리질도 소용없어질 즈음에는 하는 수 없이 개그맨으로 변신해야 한다. 때로는 재판관이 되기도 하고, 청소부가 되기도 하고, 어머니같은 자애로운 상담가가 되기도 해야 한다.
하지만 나는 늘 이런 역할들에 서툴기만 하다. 그 속에서 어떤 가르침을 녹여 내었는지도 잘 모르겠다. 좀처럼 늘지를 않는다.
애초에 내가 누군가를 가르친다는 것은 터무니없는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상대방이 아무리 어린 아이들이라 하더라도 마찬가지다. 네모난 교실에서 네모난 책상에 앉아 네모난 칠판과 네모난 책으로 공부를 하고 네모난 식판으로 점심 급식을 먹지만 아이들의 생각과 고민은 공장에서 찍어낸 것 같은 네모가 아니다.
다양한 가정환경과 다양한 관심과 다양한 걱정거리를 복잡하게 안고 살아가는 아이들에게 나의 ‘가르침’은 늘 시시한 ‘잔소리’로 끝이 나고 만다. 네모난 조각들을 이리저리 밀어서 원하는 모양을 만들어 내는 것이 내가 알고 있는 교수학습이론이라면 그것은 살아서 펄펄 날아다니는 우리 아이들에게는 무용지물일 뿐이다.
그래서 생각을 바꿔보기로 했다. ‘가르침’을 포기해 버리는 것이다. 사실 일부러 안하는 것이 아니라 못하는 것이지만 말이다.
대신 그냥 ‘위로’만이라도 되어주고 싶다. 때로는 수억원의 돈보다, 무한경쟁에서 기어이 살아남는 비법보다, 초코파이나 박카스 한 병이 사람을 더 감동시킬 수 있지 않을까? 나름 심각하게 낑낑거리며 사춘기를 버텨가고 있는 지친 아이들에게 내가 해 줄 수 있는 건 그것 뿐인지도 모른다.
나는 내일 학교에서 아이들을 위로해야겠다. 그런데 위로는 어떻게 하는 걸까? 선생하기 참 힘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