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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유적(지명)으로 보는 향토사 ⑧가야진(伽倻津)과 용신제(龍神祭)
나라의 제사 모시던 자리 이제는 민속

양산시민신문 기자 입력 2012/11/13 14:39 수정 2012.11.13 02:40






↑↑ 가야진용신제의 핵심 부분인 용소침돈례(龍沼沈豚禮)의 한 장면. 돼지를 강에 던지면서 ‘침하돈’을 세 번 외친다.


↑↑ 정동찬
양산향토사연구소장
가야진(伽倻津)은 이름 그대로 보면 가야나루다. 원동면 용당리에서 옛날 가야 땅인 김해로 건너는 나루터였고 가야와의 물물교환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던 곳이다.

도로가 생기기 전에 모든 물자가 뱃길을 이용할 때인 조선시대까지 이곳에는 커다란 시장이 섰고 강가엔 마을이 형성돼 여행객들이 머무르고 쉬어가는 숙박시설도 갖추어진 곳이었다. 이곳에 물의 신(神)인 용(龍)을 모시는 사당 즉, 용당이 있었으니 마을 이름도 용당이다.

신라때부터 국가 제의(祭儀)장소


신라시대에 나라에서 국태민안(國泰民安)을 기원하기 위하여 중요 산천에 제사를 지냈다.

동서남북 중앙에 있는 큰 산 5곳, 큰 강 4곳, 큰 바다 4곳, 군사시설 4곳을 지정하여 대사, 중사, 소사로 구분하여 제의를 하였는데, 대사는 왕이 직접 제사를 지내고, 중사는 왕의 이름으로 축문을 쓰고 향촉을 마련하여 칙사를 보내어 제사를 대신케 하였고, 소사는 지방관리로 하여금 왕명으로 제사를 지내면서 풍년농사와 풍어잡이 등 국민안전을 기원하였다. 가야진의 제사는 중사에 해당되어 조정에서 칙사가 내려와 왕을 대신하여 제사를 지내던 곳이었다.

가야진 제의는 중사(中祀)행사로서 조선시대까지 이어오면서 풍년기원과 기우제를 병행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기우제는 물의 신인 용을 불러들여 가야진용신제가 되었다.

이곳 주민들은 이 용산과 용소를 잘못 다스리면 큰 재앙이 따른다고 믿고 있었다. 조선왕조실록에 ‘경상도 가야진에 용이 나타났다’는 보고가 있어 왕이 이 일을 알아보라고 한 기록이 있다.


↑↑ 부정을 가시기 위해 제당 주변에 황토를 뿌리고 출입문에는 금줄을 치며 제수를 준비한다.
삼용(三龍)에 대한 전설


옛날 양산고을 사또가 경상감사에게 서신을 보내기 위하여 대구로 전령을 보냈는데 도중에 절세가인이 미행하고 있음을 알고 마음이 끌렸다. 해질 무렵 용당에 도착한 전령은 용소 앞 용당장의 주막에 숙소를 정하니 그 미인도 옆방에 숙소를 정했다. 전령은 미인 생각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한밤에 방문을 열어보니 마당 가운데 큰 구렁이가 똬리를 틀고 있었다.

정신을 차려 구렁이에게 연유를 물은즉 구렁이는 이렇게 답했다. “나는 황산강(낙동강) 용소에 사는 황룡의 본처 되는 청룡의 화신이다. 그대의 뒤를 미행한 것은 간곡한 청이 있어서다. 그것은 내 남편이 나를 버리고 첩용을 데리고 상천할 계획을 세우고 있는데 내일 정오경에 남편용과 첩용을 용소에서 싸움을 붙일 것이니 그대가 내일 아침 일찍 용당장에 가서 첫눈에 보이는 물건을 구입하여 배를 타고 용소로 와서 남편용과 첩용이 싸울 때 첩용을 죽여주시오”하고 구렁이는 사라졌다.

날이 밝은 아침 일찍 전령은 용당장에 가서 첫눈에 보이는 큰 장대낫을 구입해 정오경에 배를 타고 용소에 도달하니 강물이 끓어 오르면서 청룡과 황룡이 강물 위로 솟구쳐 올라 싸움을 하므로 엉겹결에 첩용을 죽인다는 것이 잘못하여 남편용인 황룡을 죽이고 말았다. 본처용이 나타나 전령에게 자신의 남편을 죽였으니 함께 용궁으로 가야 한다고 강요하여 전령은 청룡의 등에 타고 물속으로 들어갔다.

그 후 이 마을에는 알 수 없는 재앙이 자주 있어 마을사람들은 삼용신을 모시고 제사상에 메 3그릇과 잔 3개, 탕 3그릇을 놓고 제사를 올리면서 살아있는 돼지를 강 가운데 있는 용소에 던지면서 “침하돈”이라고 세 번 반복함으로써 재앙을 막았다고 한다.


↑↑ 칙사가 당도하기 전에 ‘길닦기소리’에 맞추어 길의 흙을 고르고 다지고 비질한다.
일제 때 끊어졌다 다시 이어져


일제강점기에 국가 제의가 끊기자 마을에서는 천태산 비석골에 사당을 마련하고 한밤중에 지게로 제수용품을 운반해 몰래 제의를 지냈다. 흉년이 들어도 부인들이 집집마다 보리쌀을 거두어서 어렵게 제의를 이어왔다고 한다.

광복과 6.25전쟁을 겪고 난 후 1966년 3월에 지방유지들이 가야진사 이건발기회를 구성하고 원래 위치인 곳에 부활하였다.

가야진용신제의 역사적 중요성을 감안하여 1983년에 경상남도 민속자료 제7호로 지정되었다. 1989년 가야진사보존회를 구성하여 5년간에 걸쳐 건물을 복원하고 전통행사를 재현하는 데 노력을 기울인 결과 1997년에 경상남도 무형문화재 제19호로 지정받았다.


또다시 찾아온 존폐 위기


2002년도에 대구~부산 신대구 고속도로 건설공사 과정에서 김해쪽 용산의 허리부분이 잘렸다. 주민들은 귀중한 문화재 훼손이라며 용산 보존대책위원회를 구성하여 관계기관과 건설회사를 상대로 끈질기게 투쟁하여 용산의 잘린 허리를 연결하는 데 성공하였다. 용산이 훼손 되는 것은 이들의 정신이 훼손 되는 것과 같은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 한 번 가야진사의 위기가 찾아온 것이 4대강 개발계획이었다. 4대강 개발사업의 설계도에 이곳이 체육공원으로 조성할 계획이었으므로 가야진사를 4대강 밖으로 이전한다는 것이다. 체육공원에 문화재가 밀린 것이다. 모두가 침묵했다.

그러나 용신의 도움인지 공사 도중에 지금의 가야진사 부근 땅 밑에서 옛날부터 있어왔던 흔적인 유물들이 출토된 것이다. 그뿐 아니고 그때의 가야진용신제 제의의 자료들을 찾아 제단을 설치하고 제의(祭儀) 형식도 약간 바뀌어 민속자료의 부활행사로 발전시키고 있다.


정기적으로 문화행사로 발전


오늘날 가야진사는 매년 5월 5일 가야진용신제의 재현행사를 치루고 있으며 민속예능 전수를 위한 전수관을 마련하여 전수자 양성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최근에는 낙동강변의 자전거길이 지나면서 그 가치를 더욱 높이고 있다. 명실공히 양산의 문화예술행사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자료: 가야진용신제/2006.
양산시·경상대학교인문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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