굳어지기 전까지 저 딱딱한 것들은 물결이었다.
파도와 해일이 쉬고 있는 바닷속
지느러미의 물결 사이에 끼어
유유히 흘러다니던 무수한 갈래의 길이었다.
그물이 물결 속에서 멸치들을 떼어냈던 것이다.
햇빛의 꼿꼿한 직선들 틈에 끼이자마자
부드러운 물결은 팔딱거리다 길을 잃었을 것이다.
바람과 햇볕이 달라붙어 물기를 빨아들이는 동안
바다의 무늬는 뼈다귀처럼 남아
멸치의 등과 지느러미 위에서 딱딱하게 굳어갔던 것이다.
모래 더미처럼 길거리에 쌓이고
건어물집의 푸석한 공기에 풀리다가
기름에 튀겨지고 접시에 담겨졌던 것이다.
지금 젓가락 끝에 깍두기처럼 딱딱하게 집히는 이 멸치에는
두껍고 뻣뻣한 공기를 뚫고 흘러가는
바다가 있다 그 바다에는 아직도
지느러미가 있고 지느러미 흔드는 물결이 있다.
이 작은 물결이
지금도 멸치의 몸통을 뒤틀고 있는 이 작은 무늬가
파도를 만들고 해일을 부르고
고깃배를 부수고 그물을 찢었던 것이다.
- 김기택 <2013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 9월 모의평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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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은 반찬에 지나지 않는 멸치볶음에서 생명성을 발견해 낸 시입니다. 시의 대상인 “굳어지”고, “딱딱한” 멸치는 원래 바닷길을 마음껏 헤엄쳐 다니던 생명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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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순아 시인 한국문인협회 양산지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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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조한 삶을 살고 있는, 그리고는 우리에게 화두를 던지고 있습니다. 과연 나 혹은 우리에게 바다로 상징되는 생명력이 있을까? 살아 있는 열정이 있을까?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생명력이 사라진 무덤이며, 두껍고 뻣뻣한 공기로 가득찬 감옥은 아닐까?
이런 문제의식에서 출발한 시인은 우주적 생명과 태초의 꿈을 찾아 “고깃배를 부수고 그물을 찢”고 나아갑니다. <이 멸치에는/ 두껍고 뻣뻣한 공기를 뚫고 흘러가는/ 바다가 있다 그 바다에는 아직도/ 지느러미가 있고 지느러미 흔드는 물결이 있다.>고 하여 이미 죽었지만 영원히 죽은 것은 아니라는 역설을 통해 잃어버린 생명력을 복원하려는 의지를 강하게 보여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