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양산시민신문

[역리칼럼] 춘첩(春帖)-입춘에 붙이는 바람..
오피니언

[역리칼럼] 춘첩(春帖)-입춘에 붙이는 바람

양산시민신문 기자 입력 2013/01/29 10:05 수정 2013.01.29 10:05



↑↑ 손병호
남강 역리연구원장
입춘(立春)이 코앞이다.

이날이 되면 꼭 행세하는 양반이 아닌 여염집일지라도 ‘입춘대길 건양다경’(立春大吉 健陽多慶)이라는 꽤 눈에 익은 축문을 길쭉한 한지에 정갈하게 적어 대문 앞에 날 보란 듯이 여덟 팔자모양으로 척하니 갖다 붙이는 것이 상례였다.

비뚤비뚤 귀여운 글씨체로 손주의 재주를 선보이는 집이 있는가 하면 그 내용을 짐작하기는 커녕 생전 듣도 보도 못한 한문으로 행인들의 궁금증을 자아내게 하는 선비 집도 있었다.

이러거나 저러거나 공히 재앙을 쫓고 봄의 기운을  맞이하여 집안에 경사스러운 일이 많이 일어나기를 빌어왔으니 이를 이름하여 춘첩 또는 춘축이라 불렀다.

주거구조가 바뀌어 버린 요즘은 찾기 힘든 풍속이 되었지만 전통을 살릴 수 있으면 하는 아까운 문화유산이다. 이는 본시 명절을 맞이하여 벼슬아치들이 국가와 임금의 안위를 기원하며 바치는 글인 대궐의 연상시(延祥詩)를 뽑아 모은 연상첩에서 유래되었다. 

연상시는 조선 초기에 왕명을 문장으로 받아 적는 홍문관 지제교(知製敎)들에게만 짓게 하다가 성종 때는 모든 문신(文臣)들로 확대되기도 했다. 주로 홍문관의 문관과 규장각의 제학(提學)들이 운자(韻字)를 내고 승정원에서 미리 선정한 시종신(侍從臣)과 당하의 문관들이 시를 지어 올리는 과정을 거쳤는데 그 기간은 대략 10일에서 15일 걸렸다. 연말에는 장안의 지가를 올릴 만큼 멋진 춘첩을 구상하느라 공무를 폐하는 관리까지 생겨나자 성종 연간에는 홍문관 직제학 김응기 등이 이같은 폐습을 걱정하며 임금께 상소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렇게 궁중에서 선택된 연상시들은 신속히 민간으로 퍼져나가 백성들도 같은 내용의 춘첩을 베껴 붙였으니 당선작가(?)에게는 자신의 문명(文名)을 전국 방방곡곡으로 떨치는 영광의 기회가 되었다. 

민간에서는 단순히 복을 비는 축문만이 아니라 드물지만 ‘스스로 바르게 함으로써 자신을 깨우친다’는 ‘정자계자’(正自啓自)라는 계언이나 ‘하늘의 이치를 받들어 나를 깨우친다’는 봉천리계오생(奉天理啓吾生) 등 다분히 삶과 우주에 대한 깊은 철리를 담은 첩을 붙이는 유생들도 있었다. 궁중의 춘첩은 대체로 국태민안을 비는 내용이 주를 이루었으나 임금의 덕을 칭송하는 내용도 많았다. 그중에는 자신의 품계를 올리고자 노골적인 아부를 하는 낯 뜨거운 글들도 적지 않았다.

앞으로 몇 주 뒤면 정권이 바뀐다. 차기정부는 새 정권을 위한 용비어천가보다는 애면글면하는 마음으로 ‘민생 안정’이라는 가슴 따뜻한 춘첩을 마음에 품고 묵묵히 일하는 공직자들을 발굴하는데 많은 정성을 쏟기를 바란다.

또 박근혜 차기 대통령도 외화내빈형 구호보다 고 박 대통령의 유지를 받들어 ‘서정쇄신’이라는 소박하지만 실천형 국가 춘첩으로 도탄에 빠진 서민경제를 제대로 챙겨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시민들도 새 정부가 들어서고 새봄이 되면 어떤 식으로든 나아지겠지 하는 막연한 기대감을 버려야 한다. 막연함으로 이룰 수 있는 꿈은 현실에는 없다.

굳이 대문이 아니면 어떠랴. 입춘을 앞두고 가족이 오순도순 모여 각자가 꼭 실현되기를 바라는 소망이나 목표를 구체적으로 적어보자. 눈에 잘 띄는 벽면 한 모서리에 그냥 붙여도 되고 실내 디자인을 고려하면 작은 액자로 만들어 붙일 수도 있다. 조석으로 실천하면 바로 현대판 춘첩이다.

저작권자 © 양산시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