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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원용 영산대학교 아세안비즈니스학과 교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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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펙터클한 할리우드 풍에 익숙한 요즘 관객들과는 좀 다른 영화들이지만, 왜 진한 감동으로 환호를 받고 있을까?
장발장은 허기진 조카를 위해 빵 한 조각을 훔쳐 5년, 탈옥범으로 형이 추가되어 19년을 감옥에서 처절히 지내야 했다. 이 처절한 루저 앞에는 기득권이 붙인 감시자 자베르 경감이 따라붙는다.
주어진 권력에 충실한 그는 언제나 장발장 곁에 있다. 하지만 감시하는 인생, 감시받는 인생, 실은 이들 모두 루저다. 주체적 인생이 못 되는 건 조그만 권력을 등에 업고 장발장을 쫓는 자베르 역시 다를 게 없기 때문이다.
장발장 주변의 사람들 역시 밑바닥 인생을 산다. 아이의 양육을 위하여 심지어 매춘을 할 수밖에 없는 여성들도 있다. 그들 중 한 사람이 판틴이다.
오늘날도 여전히 철저히 외면당하고, 무시당하는 이런 밑바닥 인생이 차고 넘친다. 이 루저 인생은 장발장만이 아니다. 당시 프랑스 혁명기의 민중이 또한 그랬다. 독재와 기득권이라는 대세에 항거하는 수단이라곤 자신들 앞에 바리케이드를 치는 것이 고작이었다. 오늘날 크레인 위에 올라 자신들의 아픔을 호소하는 노동자들의 피눈물 나는 외침처럼.
장발장과 혁명가들에게 구원은 있기는 한 것인가? 그러나 영화는 장발장이 판틴의 딸 코제트를 키워 혁명가 청년 마리우스와 결혼시킴으로 루저들의 삶에도 역전이 있음을 보여 준다.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자베르 경감. 비록 바리케이드의 사선을 넘나들다 운명을 달리하는 혁명가들에게 장발장, 마리우스, 코제트의 마지막이 성공한 삶이라 치부될 수 있기에 그나마 관객들을 위로를 받는다.
그러나 ‘7번방의 선물’ 속 루저는 철저히 구겨져 버린다. 죽음으로 사랑을 실천하는 구도가 너무나 관객을 안타깝게 만든다. 주인공은 지적장애인이다. 결론 또한 ‘레미제라블’과는 사뭇 다르다. 쉽게 말하자면 ‘레미제라블’의 루저가 성공한다면 ‘7번방의 선물’의 루저는 실패한다. 전자는 성공해서 눈물이 나고, 후자는 실패해서 가슴 뭉클하다.
딸보다 못한 지능으로 딸을 사랑하는 딸 바보 아빠 용구의 아픔은 그의 연기력 탓인지 너무나 사무치게 가슴에 다가온다. 천진무구한 사랑에 영화를 보는 내내 몇 번인가 모를 흐느낌을 참는 게 여간 곤욕이 아니다. 그러나 그의 천진난만한 사랑이 권력 앞에 무릎을 꿇고 만다.
“네가 죽어야 딸이 산다”는 어처구니없는 논리는 그가 선택할 유일한 길이다. 딸에게 세일러문 가방을 사 주기 위해 마트에서 허드렛일에 온몸을 사르는 그에게 ‘어린이 강간 치사범’이라는 죄명은 너무나 가혹하다.
억울하게 감옥에 갇히고, 후에 딸 예승이의 삼촌 팬들이 되는 7번방의 식구들인 오달수, 김정태, 박원상, 정만식, 김기천 등의 피나는 노력에도 사형당해야 하는 루저들, 용구는 그렇게 실패했다. 그래서 가슴 절절히 애절하다.
후에 비록 사법연수원에서 벌어지는 모의재판이긴 하지만 성인이 된 예승이 변호사가 되어 아버지의 죽음이 부당함을 변호하는 통쾌함이 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현실에서는 있을 수 없는 모의재판일 뿐이다. 죽음으로 딸을 살려 낸 구도에서는 그 살아난 딸이 아버지를 다시 살릴 수 없다는 난제 앞에 속수무책이다.
두 영화 모두 흥행에 성공했고. 두 영화 모두 우리를 울게 만들었다. 두 영화 모두 루저들의 역습에 침착한다. 두 영화 모두 종교, 선과 악, 기득권과 소외층 등의 이념을 적절히 영상화시킨다. ‘레미제라블’이 음악적 스펙터클의 영상화라면, ‘7번방의 선물’은 해학을 가미한 소시민적인 삶의 영상화다. 후자는 앞에 든 가치들에 장애인, 유괴, 살인, 사건의 재구성 등의 살을 덧붙였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어떤 틀이 있다. 악인은 악한 행위를 하는 사람이다. 선인은 선한 행위를 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두 영화에서는 그런 도식에 선을 긋는다. 악인도 선한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세상의 법이 낙인찍은 어떤 테두리를 무너뜨리는 그 과감성 때문에 가슴이 뭉클하다. 장발장은 죄인이지만 선한 사람이다. 용구는 선한 사람이지만 옥살이를 한다. 7번방 식구들은 강간, 살인, 밀수범, 사기꾼, 소매치기, 자해공갈범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가슴 따듯한 이야기를 선물한다.
‘7번방의 선물’은 재판의 모순, 경찰 간부의 비리, 사형 제도의 불합리성 등을 건드리며 회화화하지만 이슈화하지는 않는다. 변죽을 울림으로 관객의 맘을 더욱 가슴 저리게 만든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포인트가 있다. 루저의 역습이라는 점에서 두 영화는 만난다.
‘레미제라블’이 장발장이나 여타 그 부류 사람들의 성공이라는 메커니즘으로 접근한다면, ‘7번방의 선물’은 철저히 용구의 희생의 메커니즘으로 접근한다. 전자가 살아서 역습한다면, 후자는 죽어서 역습한다.
내게 점수를 주라면 단연 후자다. 성공의 힐링보다는 실패의 힐링이, 살아서 힐링하기보다는 죽어서 힐링하는 게 더 가슴에 남기에. 우리의 역사 속에서 죽어서 우리에게 더 많은 기쁨과 행복을 안겨 준 모든 이에게 박수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