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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시민신문

군(郡) 소재지로 명성과 번영을 누렸던 원도심..
기획/특집

군(郡) 소재지로 명성과 번영을 누렸던 원도심

양산시민신문 기자 입력 2013/03/05 11:24 수정 2013.03.05 01:24
2013 연중기획 양산의 어제와 오늘


③ 북부동 전성시대



조선조 고종 건양원년인 1896년 경상도를 남북으로 분리하면서 양산은 경상남도에 속하게 됐다.

그로부터 10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양산은 조용한 농촌으로 인식돼왔다. 메기들로 불리던 수백만평의 들판이 빌딩숲으로 바뀌면서 상전벽해를 이루고, 수천개의 공장이 가동되고 끊임없이 중장비가 돌아가면서 공사가 진행 중인 역동적인 도시가 된 것은 최근 30년의 일이다.

양산의 도시화, 산업화를 촉발시킨 배경에는 경부고속도로가 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국회와 사회 일각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국가발전의 기반이 될 것으로 확신하고 밀어붙였던 것이 경부고속도로다.

하지만 그 노선도 경부선 철도와 같이 밀양, 청도 방향으로 건설되었으면 양산은 자칫 ‘낙동강 오리알’이 될 뻔 했다.

하지만 천년 고도 경주와 중화학 거점도시 울산과의 연결을 고려한 노선 책정으로 지금의 경부고속도로가 건설되기에 이르렀다. 일각에는 당시 지역구 국회의원의 입김이 크게 작용했다는 설도 있다.

특히, ‘1시·군 1나들목’의 원칙이 준용되던 상황에서 양산과 통도사 두 군대의 나들목이 개설된 것은 우리 지역으로 봐서는 행운이었다. 1972년 고속도로의 개통으로 교통과 물류조건이 획기적으로 발전되면서 부산지역의 제조공장들의 이전이 가속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1970년대 중반부터 공장용지 조성사업이 줄을 잇기 시작한 배경이다.

↑↑ 1950년대 북부동 사거리
↑↑ 2008년에 찍은 북부동 사거리
위의 사진은 1950년대의 북부동 모습이다. 당시 양산군청이 지금의 중앙동사무소 자리에 있었는데 바로 이 사진 오른쪽 방향이 군청으로 가는 길이다.

양산면사무소는 최근 양산교회미션센터로 바뀐 남부동 옛 교육청 자리 바로 맞은편에 있었다. 중앙의원이라는 간판이 서 있는 옆으로 시외버스정류장이 있었다. 부산 동래에서 팔송을 거쳐 동면 사배고개를 넘어 내송, 다방을 거쳐 면소재지에 들어설 때까지 길은 자갈길로 버스 한 대가 지나가면 그야말로 주변 상점과 집들은 폭탄 맞은 듯 먼지를 뒤집어쓰곤 했다.

↑↑ 1976년의 북부동 큰길
↑↑ 2008년의 북부동 간선도로변
두 번째 옛날 사진이 버스가 지나다니던 큰길가의 집들이다. 가끔 일본식 적산가옥이 2층짜리가 있을 뿐 단층의 기와집과 슬레트집이 대부분이었다.

거리를 가로질러 사람 이름이 적힌 현수막이 걸린 것을 보니 지영진이라고 씌여있다. 자료를 살펴보니 1954년 제3대 국회의원선거에서 무소속 지영진 후보가 9천64표를 얻어 당선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지영진 의원은 제4대에도 당선되었지만 5.16 군사정변으로 임기를 마치진 못했다.

↑↑ 1976년 중부동 뒷길
↑↑ 2008년에 찍은 중부동 뒷길
세 번째 옛날 사진은 중부동 삼동길이다. 지금의 장애인회관 맞은편으로 중앙비전센터를 지나 옛 교육청으로 가는 오르막길이다. 여학생들이 옆구리에 끼고 가는 것이 성경책처럼 보이는데 양산교회의 역사가 100년이 넘었으니 아마 교회에 가는 학생들인 모양이다.

길바닥을 자세히 보면 작은 자갈들이 보인다. 당시는 대부분의 도로가 자갈길이었다. 버스가 다니는 큰길도 포장공사가 되기 전이라 수시로 동네사람들이 나와 자갈을 다시 쌓고 고르는 노역을 해야했다. 그렇게 부역을 못할 형편이면 대신 곡식이라도 내놓아야 했다.

1957년 음력 칠월칠석날 저녁 며칠째 쏟아진 폭우로 명곡에서 흘러내려오는 북부천이 범람하기 시작하더니 순식간에 하신기마을과 읍내를 덮쳤다. 하신기마을에서만 수십명이 목숨을 잃었고 많은 이재민이 발생했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직접 부산, 양산 인근의 수해피해지역을 위문차 내려왔지만 이곳에는 온다고 했다가 실제로는 오지 않았다고 한다.

↑↑ 정동찬
양산향토사연구소장
일설에는 한국동란 중 좌익계열이 많이 활동한 지역이라 위협을 느껴 방문을 취소했다고 한다. 많은 양산사람들은 그때 이 대통령이 실제로 왔었다고 기억하고 있다. 요즘도 하신기마을에서는 많은 가정에서 치월칠석날 제사를 올리고 있다. 지금의 신기동 한마음아파트 옆 제방은 그때 수해를 당한 뒤 새로 쌓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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