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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시민신문

1970년대 말 소도읍가꾸기 사업으로 도시 면모 일신..
기획/특집

1970년대 말 소도읍가꾸기 사업으로 도시 면모 일신

양산시민신문 기자 입력 2013/04/02 10:45 수정 2013.04.02 10:47
양산의 어제와 오늘 ④ 신작로의 출현



↑↑ 2008년에 중부동 간선도로변
메기들로 상징되는 수백만평의 농경지가 양산천을 따라 광활하게 펼쳐진 양산은 1970년대까지는 그야말로 평화로운 농촌마을이었다. 지금의 종합운동장과 체육관 자리에서 시작된 들판은 양산천이 낙동강과 합류하는 호포까지 연결된 곡창지대였다.

↑↑ 2008년에 찍은 중부동 사거리
하지만 이곳도 조선시대까지는 해마다 연례행사처럼 발생한 낙동강의 범람으로 곡수가 신통치 않은 저습지가 대부분이었다. 오죽하면 경작농민들이 조정을 향해 농지세를 감면해달라고 수없이 청원을 올렸겠는가. 메기들이라고 부른 이유도 뻘밭에 메기들이 많이 서식하고 있어 이들이 침만 흘려도 강물이 범람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일 정도다. 메기들판이 최상급 곡창으로 거듭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일제(日帝)가 저지른 식민지 수탈(收奪)의 결과물이었다. 홍수를 방지한 양산천 제방을 새로 쌓고 대규모 경지정리가 시행된 것이 일제강점기였다는 말이다.

↑↑ 1979년 양산소도읍가꾸기 사업 모습
조용한 농촌이 산업화의 태동을 가능하게 했던 것은 지난호에 이야기한 것처럼 경부고속도로의 개통이 큰 역할을 했다. 이와 함께 지방행정단위의 구역조정이 있었는데 1973년 경남도의 동래군을 양산군에 통합한 것이었다. 당시 군세(郡勢)로 보아서는 동래군이 경남도 내에서도 가장 컸는데 어찌된 판인지 우리군에 예속된 것이다. 그 결과 우리군은 획기적인 발전의 기폭제가 됐지만 동래군 지역의 유지들로서는 기가 찰 노릇이었다. 개중에는 합병 이후에 우리군 쪽을 보고 오줌도 누지 않는다는 말을 할 정도로 반발이 심했다.

↑↑ 2008년의 북부동 간선도로변
이렇게 지금의 부산시 기장군 일대와 울주군 서생면까지를 포함한 큰 관할구역을 가지게 된 양산군이었지만 도시기반시설은 한참 낙후돼 있었다. 당시 군청이 있던 북부동(지금의 중앙동사무소 자리) 주변의 간선도로가 비포장 자갈길이었던 것은 물론이고 도로변 가옥들은 대부분 오래된 기와나 초가집이 대부분이었다. 부산과 언양을 오가던 ‘빨간 버스’가 지나갈 때면 흙길에서 먼지가 뽀얗게 일어 양쪽의 가옥은 흡사 탄광촌처럼 먼지를 폭삭 뒤집어쓰곤 했다. 1970년 추석 무렵에는 비포장 자갈길을 달리던 버스가 동면 내송마을을 막 지난 곳에서 하천으로 추락해 많은 사상자가 발생한 사건도 있었다. 

↑↑ 1979년 양산소도읍가꾸기 사업 모습
지금의 경남은행 사거리에서 북부동 신한은행(옛 버스 터미널 자리) 까지의 간선도로변에 대한 소도읍가꾸기 사업이 시행된 건 1970년대가 거의 끝나갈 즈음이었다. 15m 폭의 도로를 확보하고 기존 가옥을 철거한 자리에는 3~4층의 새 건물이 들어섰다. 새마을운동의 일환이기도 했던 양산면(당시)소도읍가꾸기 사업은 토지나 건물 소유자들의 반발로 상당한 곤혹을 겪기도 했다. 1공구였던 경남은행 사거리에서 지금의 등기소 입구까지 한 블록에 불과한 구간의 추진도 험난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지금처럼 도로에 편입되는 땅의 보상이 제대로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포장도로를 내주면 그만큼 주변 지가가 올라가니 그걸로 상쇄하자는 논리다 보니 주민들과의 실랑이가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담당 공무원이 현장에서 반대하는 주민들로부터 똥물을 뒤집어쓰기도 했다니 어려웠던 상황이 짐작이 된다.

↑↑ 1950년대 중부동 사거리
위 사진은 바로 그때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넓어진 새 도로와 맞닿게 새로 짓는 건물이 보이는가 하면 그때까지도 철거되지 않은 기존가옥들에도 여전히 주민들이 살고 있다. 사진처럼 도로 한쪽은 그대로 있고 한쪽만 확장하는 방식이었던 것이 지주들의 반발을 많이 불러온 것으로 보인다.

↑↑ 정동찬
양산향토사연구소장
한편 경남은행 사거리에서 똑딱골(옛 터미널 영일약국 인근) 사이로는 큰 시내가 흐르고 있었다. 중부동 산성 부근에서 내려오는 소하천이 신기에서 내려오는 용수로와 마주치는 곳인데 1970년대에 복개되어 지금은 원도심 간선도로인 삼일로가 되었다. 해방 후 1970년대까지 양산의 제일 중심은 바로 이곳 경남은행 사거리였고 1980년대까지 가장 비싼 땅으로 거래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도심의 외형적인 모습이 탄생했지만 그 과정에서 무리하게 건물 신축에 나섰던 일부 주민들은 부채를 감당하지 못해 파산하는 경우도 나오는 등 도시화의 과정에서 애환이 뒤따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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