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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도 동남권 제일의 상공업도시 첸나이의 마드라스 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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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인도는 어느 진영과도 동맹을 맺지 않는다는 비동맹을 내세워 유고, 인도네시아 등과 함께 아시아, 아프리카의 약소국을 규합하여 제3세력의 수장역할을 한다. 그러나 실제로 인도는 사회주의 경제체제를 받아들이고 소련과 가깝게 지낸다. 따라서 미국은 국제정치 무대에서 인도를 소련으로부터 떼어 놓는 것이 하나의 목표였으며 소련 및 동구권이 붕괴되어가던 80년대 말에 이르러 그 기회를 포착하게 된다.
비동맹의 맹주에서 친미로 돌아서
80년대 후반부터 무역 및 재정적자가 늘어난 인도는 90년 초에 교역규모 300억불에 외채가 700억불에 달하게 되고 무역수지 적자도 계속 증가하고 있었다. 90년 하반기에 들어 IMFㆍIBRD 등 국제금융기관이 인도에 대한 외환을 통제하고, 일본ㆍ영국 등이 원조를 축소하는 등 이에 동참하면서 외환위기가 악화됐다. 인도정부는 정부보유 금을 영국, 스페인에 매각하는 등 자구노력을 했으나, 결국 91년 1월 외환부족으로 당분간 수출입을 전면 중지한다는 발표를 하게 된다. 인도에 IMF 위기가 찾아온 것이다.
달러보유고 부족으로 수출입 중단이라는 극한 상황까지 내몰린 인도는 걸프전이 발생하자 미국 군용기에 급유를 해주는 등 미국의 비위를 맞추었다. 이 때문에 중동ㆍ아프리카 및 남아시아 국가들로부터 ‘미국의 앞잡이’라는 비난을 듣게 된다.
또한 인도는 구소련과 동유럽 국가들과의 교역에서 자국 통화 루피화로 결제하던 것을 중지했다. 당시 인도는 생필품을 구소련에 수출하고 군수물자ㆍ기계류를 수입했다. 통화는 달러 대신 루피화로 사후 정산하는 소위 ‘루피 트레이드’를 채택해 소련과 군사적ㆍ경제적으로 긴밀한 협력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외환위기에 처하자 인도가 무역 대금을 달러로 결제할 것을 소련에 요청하였으나 소련도 달러가 부족하여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면서 양국간 루피교역은 중단됐다.
냉전 시절 제3세계 비동맹국의 맹주로서 세력균형의 한 축을 이루던 인도가 몰락하면서 미국의 앞잡이라는 불명예까지 얻게 된 것이다.
IMF 위기에 개방경제로 전환 ↑↑ 미국은 인도진출의 첨병으로 은행을 이용했다. 사진은 델리시내에 있는 시티은행 ⓒ
IMF 위기가 한창이던 1991년 5월 27일 차기 수상으로 유력하던 네루 가문의 라지브 간디가 선거 유세 중 암살된다. 이어서 라지브가 이끌던 국민회의당 원로인 라오가 수상에 선출된다. 라오는 사회주의 색채의 내부지향 통제경제를 버리고 외부지향 개방경제로 대전환을 한다.
신정부는 친서방 정책을 폈다. 환율의 대폭 절상, 외국인투자 자유화, 비효율적인 공기업 매각 등 대대적인 개혁정책을 시행하는 등 IMF의 요구를 적극 수용했다. 이에 따라 국제금융기구에 의한 달러 차관이 재개되고 일본ㆍ영국이 동참하면서 인도는 겨우 외환위기를 넘긴다.
외환위기에서 한숨 돌린 인도정부는 정책의 최우선을 외환보유고 극대화에 두었다. 우선 다급한 전력ㆍ항만ㆍ도로ㆍ통신 등 사회기반 시설에 대한 외국인 투자를 자유화했다. 기업의 국제경쟁력 제고를 위해서는 외국기술의 도입이 필수라고 생각하고 외국기업의 경영권 확보를 보장하였다. 이로서 종전에 인도에서 쫓겨나다시피 한 코카콜라가 재진출하고 맥도날드가 허용되는 등 다국적 기업의 인도 진출이 재개됐다. 인도경제 대변혁의 신호탄이었다.
미국과 인도의 밀착
2006년 3월 3일 조지 부시 미대통령이 인도를 방문해 역사적인 미ㆍ인도 핵협정이 체결되었다. 그동안 인도는 북한ㆍ이란과 마찬가지로 핵비확산조약(NPT)에 가입하지 않아 문제가 되고 있었다. 이를 미국이 나서서 예외를 인정해주었고 원자력 발전소 가동에 필수인 핵물질공급그룹(NSG)을 설득하는 등 인도가 당면한 문제들을 미국이 직접 나서서 해결해 주었다.
미국은 왜 이렇게 인도와 손을 잡으려고 노력할까? 1974년 인도가 핵실험을 하자 미국은 인도에 대한 경제제재를 오랬 동안 유지했다. 그러나 1998년 5월 인도가 두 번째 핵실험을 했을 때는 즉시 제제조치를 취하기는 했으나 일년 만에 해제했다. 더욱이 2000년 3월에는 클린턴 대통령이 인도를 방문해 ‘청정에너지와 환경보호’라는 명분 하에 핵 협력을 위한 공동협력기구까지 설치했다. 이와 같은 미국의 태도 변화는 실제로는 1991년 인도의 외환위기 이후 인도가 친소정책에서 친미정책으로 전환한 이후부터 싹 튼 것으로 볼 수 있다.
2차 대전 이후 미국대통령의 인도방문 현황을 보면 1959년 아이젠하워, 1969년 닉슨, 1978년 카터, 2000년 클린턴, 2006년 부시 대통령으로 이어졌다. 1978년부터 2000년까지 무려 20여년 간 미국대통령의 인도방문이 전혀 없었다. 이렇게 미-인도 관계는 아주 소원했었는데 2000년 클린턴 방문이후 6년 만에 다시 부시가 인도를 방문해 양국이 핵협정까지 맺었다. 이 두 국가는 2006년 3월 부시 대통령의 인도 방문 전 해인 2005년부터 급속히 가까워졌다. 이후 국제사회의 난관을 헤치고 2008년 10월 10일 최종 핵협정이 체결될 때까지 양국의 노력은 상당했다.
양국은 왜 핵협정에 몰두했을까? ↑↑ 인도는 1974년과 1998년 두 차례의 핵실험을 통해 사실상 핵무기 보유국으로 인식되고 있다 ⓒ
미국은 1991년 소련의 몰락 이후 세계의 유일한 슈퍼파워로서 위세를 떨치고 있었다. 그러나 소련 붕괴 후 10여년 만에 중국의 위상이 급속히 높아져 과거 소련 이상의 위협감을 느끼게 됐다. 이에 아시아 대륙에서 중국을 견제할 대안으로 인도가 주목받은 것이다.
중국의 급성장은 국경문제로 중국과 분쟁을 겪어본 인도에게도 커다란 위협요인으로 대두됐다. 캐시미르지역 분쟁으로 파키스탄과 대치관계에 있는 인도로서는 중국과 파키스탄이라는 두 세력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미국의 지원이 절실했다.
경제적 측면에서도 양국의 이해관계가 일치됐다. 1991년 외채위기 이후 인도는 지식산업 인력을 무기로 고도성장 초입에 들어섰다. 지속적인 고성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전력ㆍ도로 등 제조업 성장에 필수적인 인프라 구축이 시급했다. 이를 위해 인도는 대규모의 서방자본 도입이 절실했으며 미국은 원자력 발전에 필요한 민수용 핵기술 및 핵연료 판매라는 경제적 이익이란 점에서 양국의 이해가 일치했다.
미ㆍ인도 핵협정 체결의 영향은 아래와 같이 몇 가지 점이 부각됐다.
우선 인도의 인프라부족 해소의 전환점이 됐다.
2006년 3월 부시 대통령과 싱 수상의 핵협정 이후 중국으로 집중되던 외국자본이 인도로 일부 발길을 돌리는 현상이 나타났다.
둘째, 파키스탄과 중국의 밀착 가능성이 나타났다.
과거 소련과 가까운 인도를 견제하기 위해 파키스탄과 미국이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으나, 1991년 외채위기 이후 인도가 친미로 돌아서면서부터 중국과 파키스탄의 관계가 가까워졌다.
셋째, 중앙아시아를 대상으로 미국ㆍ인도ㆍ이스라엘의 협력이 지속될 것이다.
인도와 파키스탄이 분쟁 중인 캐시미르지역에서는 90년대 이후부터 이스라엘 정보기관의 활동이 암암리에 진행되고 있다. 90년대에 무슬림 단체에 의한 이스라엘인 납치사건이 캐시미르 지역에서 몇 번 발생한 것이 이를 암시한다. 미국은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서라도 아프가니스탄에 자기 세력을 강화할 전략을 지속할 것이며 이를 위해 인도의 지원이 필요한 상황이다. 중앙아시아지역, 특히 아프가니스탄을 염두에 둔 미국ㆍ인도ㆍ이스라엘의 협력이 이 지역을 중심으로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넷째, 인도가 남아시아의 패자로 등극할 가능성이 높아졌다.
현재 인도의 고성장 추세는 향후 전력, 도로, 항만, 철도 등 인프라구축 여부에 크게 좌우될 것인데, 핵협정 이후 서방 다국적 기업들의 관심이 중국에서 일부 인도로 돌아서는 추세가 더욱 가속될 것으로 전망되므로 인도의 성장추세는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다섯째, 인도 내 종교대립은 지속될 것이다. 인도 내의 종교분쟁은 힌두와 무슬림 간의 대립이다. 인도의 종교 분쟁은 단지 내부적인 문제에 그치지 않는다. 카슈미르 분쟁과 같이 파키스탄과 연관되어 있고, 나아가 중동의 이슬람 지역 전체와 연계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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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운용 한국외대 인도어과 한국외대 지역대학원 정치학 석사 인도 첸나이무역관 관장 한국인도학회 부회장(현) 영산대 인도연구소장(현) 영산대 인도비즈니스학과 교수(현) 영산대 기획처장(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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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들어 국제금융 자본과 인도 상인카스트 그룹들의 네트워크가 보다 긴밀해졌다. 지난 5, 6년 사이 국제금융기구와 세계적 금융회사에 인도인 전문가들이 많이 포진해 이들의 영향력이 커진 것도 한 요인이 된다. 인도기업의 해외 M&A에 우호적 환경이 조성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