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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이운용교수의 인도 비즈니스
불교의 탄생, 소멸 그리고 부활

양산시민신문 기자 입력 2013/06/11 11:36 수정 2013.06.11 11:37
⑦ 인도와 불교 - 1





↑↑ 부처님께서 처음 설법한 것을 기념해 만든 스투파로, ‘조천법륜탑’이라고 부른다. 사르나트에 있는데 높이가 34m에 이른다.
인도는 종교의 나라다. 지구상의 모든 종교가 다 있다는 의미도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인도인의 생각, 생활 등 모든 것이 종교와 연관돼 있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힌두교다. 12억 인구 중 힌두교는 80.5%나 된다. 그 외에 이슬람교 13.4%, 기독교 2.3%, 시크교 1.9%, 자이나교 0.4%이다. 그런데 인도에서 탄생한 불교는 겨우 0.7%로 1천만명도 채 되지 않는다. 그 이유를 알아보기 위하여 불교의 탄생부터 소멸까지의 과정을 한 번 살펴보자.


불교의 탄생 배경


B.C. 6세기는 전세계적으로 새로운 종교의 탄생 등 커다란 변혁이 이루어진 시기다. 중국의 유교, 이란의 조로아스터교 등이 새로운 사회ㆍ종교적 질서를 외치며 나타났다. 인도에서도 이 시기에 갠지스 평원을 무대로 무려 62개의 종교가 나타났다고 한다. 이 중에서 자이나교와 불교가 가장 큰 세력을 구축하게 된다.

고대 인도사회는 베다시기를 지나면서 출생 신분에 의거해 4개의 계급으로 나뉘어진다. 제사를 주관하는 승려와 선생, 학자 계층의 브라만, 관료와 군대를 담당하는 크샤트리아, 농업과 목축, 상업을 담당하는 바이샤, 그리고 상위 3개 계급을 최하층에서 봉사하는 수드라가 그것이다.

이 중에서 최상위의 브라만들은 세금도 내지 않고 형벌도 받지 않는 특권을 누리고 있었다. 이러한 사회구조에 불만을 가진 크샤트리아 계층에 의해 브라만의 종교적 신성특권을 부정하는 운동이 새로운 종교 탄생의 한 요인이 됐다. 자이나교 창시자 마하비르(Vardhaman Mahavir)와 불교의 창시자 붓다(Gautam Buddha)가 크샤트리아 계층이었으며, 이들이 브라만의 권위에 도전한 것이다.

↑↑ 석가모니의 해탈지 보드가야 대탑은 남아있는 인도 불교 유적 가운데서도 가장 큰 위용을 자랑한다.
북인도 갠지스 평원의 중심인 우따르쁘라데시, 비하르지역은 현재처럼 황량한 벌판이 아니라 당시에는 강수량이 많아서 숲이 우거진 열대 우림을 이루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B.C. 600년께부터 이 지역에 철기문화가 보급되면서 숲을 개간하고 농경인구가 급증하게 됐다. 이들은 소와 같은 가축을 이용하여 농사를 지어야 하는데, 베다의 종교적 전통에 따르면 제사를 지내기 위해 소를 대규모로 도살해야 했다. 여기서 베다의 전통을 유지하려는 세력과 농사를 위해 가축을 유지하려는 세력 간의 사회적 마찰이 새로운 종교 탄생의 배경으로 지목되기도 한다.


불교를 지원하게 된 이유


또한 이 시기에는 도시들도 많이 생겼다. 쿠시나가르, 바라나시, 라즈기르 등 불교 성지로 알려진 북인도 중앙의 갠지스 평원일대에 도시가 대거 발달하면서 상인과 수공예업자들이 활발하게 활동하고 동전 사용이 처음 등장한다. 동전의 사용은 상인들의 거래 활성화를 유발해 바이샤 계층이 사회적으로 부상하게 된다. 자연히 그들은 자기들의 입장을 강화시켜 줄 종교를 원하게 되면서 자이나교와 불교를 적극 지원하게 된다.

그들이 자이나교와 불교를 지원하게 된 이유는, 첫째 두 종교는 태어난 신분에 따른 계급 구분을 부정했고, 둘째 비폭력을 주장하는 이들 두 종교에 의해 군소 왕국들 간의 전쟁이 줄어듦으로서 안전한 상업 활동을 보장받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셋째 브라만의 율법(Dharmasutras)은 이자를 금지하므로 대부업을 하는 바이샤들은 사회적으로 존경 받지 못했다. 따라서 자신들의 사회적 지위를 높이려는 상인들이 자이나교와 불교를 지지하게 된 것이다.

자이나교와 불교의 성직자들은 호화로운 생활을 거부하고 금이나 은을 만지는 것조차 허용되지 않았다. 단지 생명을 유지할 만큼만 후원자들로부터 받을 수 있었다. 이들의 탁발 전통이 불교 전래와 함께 우리나라에도 들어온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청교도적인 금욕생활이 우리나라 스님들의 전통에도 남은 것으로 볼 수 있다.

자이나교와 불교는 공통점이 매우 많았다. 창시자가 모두 크샤트리아 계급이었고, 브라만의 정통성을 부정하며 베다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다. 또한 동물을 제물로 올리는 것도 반대했다. 두 종교 모두 사회적으로 천대 받는 계급에게 호응을 받았다. 경제력은 있으나 그에 걸맞는 사회적 대우를 받지 못하는 바이샤 계급, 항상 억압만 받는 수드라 계급이 자이나교와 불교의 주된 지지층이었다.

↑↑ 힌두교에서 신성시하는 소들이 인도 시내를 한가로이 걷고 있다. 인도에서는 암소를 죽이는 일이 카스트 계급 중 최상위인 브라만을 죽이는 것과 같다는 이야기도 있다.
자이나교와 불교가 카스트제도를 직접 공격한 것은 아니라 해도 브라만과 베다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은 점에서 반 카스트 운동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폭력과 살생을 반대하는 아힘사(ahimsa : 비폭력) 원리는 B.C. 6세기 무렵 인도의 물질문화 발전에 기여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자이나교의 극단적인 비폭력 강조는 직업상 곤충, 해충 등을 죽여야 하는 농민계층에게는 방해가 됐고, 동물의 뼈 등으로 공예품을 만드는 수공예업자들도 마하비라(Mahavira : 자이나교 창시자)의 생각을 거부하게 됐다.

자이나교는 개인 재산, 특히 토지 소유를 부정하게 됨에 따라 신도들은 상업에 치중했다. 이에 따라 자연스레 자이나교도들은 도시문화의 확산과 해상교역에 기여하게 된 것이다.
 
자이나교와 불교의 차이점


자이나교와 달리 불교는 아힘사를 극단적으로 강조하지는 않았다. 비록 다른 생명체를 해하지 말라고는 해도 불교도가 아닌 도살자가 공급하는 고기는 먹어도 된다고 했다. 불교는 가축을 경작에 필수적인 것으로 인정하고 있어서 농민계층의 이해와 합치되었다. 부처는 ‘한 승려가 마하비지타(Mahavijita) 왕에게 농부에게는 씨앗을, 국가 공무원에게는 가축 등을 주라고 한’ 설화를 상기시키기도 하였다. 자이나교와의 이러한 차이점은 불교가 당시 현실을 잘 파악하고 있으며 농민들에게 쉽게 받아들여지는 계기가 되었다.

브라만교의 교리에 따르면, 브라만 계급은 술・향수・옷・곡류의 교역은 금지돼 있다. 이런 물품을 거래하는 사람들은 천하다고 간주하기 때문이다. 필자가 인도 첸나이 무역관장으로 주재 할 때 일이다. 스리니바산이라고 당시 주정부 차관을 잘 알고 지냈다. 그의 딸이 결혼한다는 소식을 듣고 피로연에 사용하라며 양주를 선물하였는데 그는 끝까지 사양했다. 나중에야 그 이유를 알았는데 브라만 계층인 그로서는 술을 선물로 받을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해상교역에 대해서는 불교와 자이나교는 비슷한 입장이었다. 바다를 항해하는 것도 저주 받을 일이라고 생각한 시대에 불교는 항해를 인정했다. 당연히 바다를 건너 교역을 하는 신흥 상인계층은 불교를 지지했다.


불교의 탄생과 중흥, 전파


석가는 기원전 560년에 태어나 기원전 480년에 80세를 일기로 돌아가셨다. 석가가 태어난 곳은 히말라야산맥의 팔파산 기슭의 룸비니이다. 룸비니는 현재 네팔 국경 안에 있다. 석가의 정식 이름은 싣다르타 고타마(Siddhartha Gautama)이다. 29세에 출가한 석가는 35세에 보드가야에서 깨달았으며 80세에 쿠시나가르에서 입적하였다. 석가가 설교를 하고 다닌 곳은 주로 마가다국과 코살라국으로서 현재의 비하르주 남부, 우따르 쁘라데시주 동부지역 일대다.

불교의 4대 성지는 현재의 지명으로 볼 때 북인도 우따르쁘라데시 주 동쪽에 고락뿌르를 중심으로 펼쳐져 있다. 탄생지 룸비니는 고락뿌르에서 약 100km 북쪽 네팔영토 내부에, 입적지 쿠시나가르는 고락뿌르에서 동쪽 55km에, 최초 설법지 사르나트(녹야원)는 고락뿌르에서 남쪽 170km에, 해탈지 보드가야는 고락뿌르에서 동남쪽 200km 지점에 있다. 사르나트 바로 옆에 힌두교도들의 최대 성지인 바라나시가 있다.

석가는 탄생(jati)과 함께 사회적 지위가 결정된다는 카스트 제도를 거부하고 인간의 행위, 생각, 생활 방식 등에서의 옳고(samyak), 그름(mithya)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 이운용

한국외대 인도어과
한국외대 지역대학원 정치학 석사
인도 첸나이무역관 관장
한국인도학회 부회장(현)
영산대 인도연구소장(현)
영산대 인도비즈니스학과 교수(현)
영산대 기획처장(현)
석가가 창시한 불교는 이후 마우리아 왕조의 아쇼카 대왕에 의해 융성기를 맞이한다. 아쇼카 왕은 힌두쿠시에서 벵갈만, 아프가니스탄, 발루치스탄 등까지 영토를 넓힌 정복군주였다. 동부 인도지역의 콜카타 남쪽 오릿사 지역을 정벌하기 위해 벌인 칼링가(Kalinga)전투에서 대량의 인명살상과 파괴를 자행한 아쇼카 왕은 비참한 현장을 보면서 더 이상 전쟁을 하지 않겠다고 결심한다. 이후 그는 부처의 가르침을 받아들여 ‘인간의 마음을 정복’하는 일에 여생을 바친다. 즉 ‘신앙에 의한 정복’(Conquest by Piety ; Dharma Vijaya) 이라는 정책을 펼치는 것이다. 마우리아 왕조가 망한 후 AD 1세기에 쿠샨왕조가 들어섰다. 3대 카니시카 왕(AD 125-162)의 노력으로 불교는 다시 한번 중흥기를 맞이하고 그리스 양식이 접목된 간다라 미술이 유행한다. 이 시기에 불교의 해외전파가 이루어져, 이후 동남아시아와 중국, 한국, 일본 등으로 전해져 현존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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