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양산시민신문

[청소년이 행복한 사회] 친구를 두려워하는 아이들..
오피니언

[청소년이 행복한 사회] 친구를 두려워하는 아이들

양산시민신문 기자 입력 2013/06/25 14:16 수정 2013.06.25 02:16



↑↑ 김선희
양산시청소년상담복지센터 상담지원팀
어제 오늘 일이 아닌 학교폭력, 학원폭력, 청소년폭력 등의 말들 속에 녹아져 있는 복잡 미묘한 관계를 현장에서 직접 접하면서 만감이 교차할 때가 많다. 이러한 상황이 하나의 유행처럼, 문화처럼 자리 굳힘을 하는 것은 아닌지 걱정도 되고 과연 그 끝은 어디일까 암담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지인의 5살짜리 딸과 얘기를 한 적이 있다. 어린이집에서 ○○가 자기와 안 놀아 준다는 것이다. ‘그러면 넌 어떻게 하니?’라고 되물으니 “○○말고 △△가 나와 같이 놀아줘서 괜찮아요”라고 했다. 왕따 해결에 대한 핵심이 바로 이것이다. 이 친구와 사이가 좋지 않더라도 다른 친구와 놀 수 있으면 괜찮은 것이다. 5살짜리는 너무나도 쉽게 해법에 접근을 하는데 초등학생 이상의 청소년들은 그것이 힘들다.

폭력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서로 사이좋은 초등학생들이 자기의 비밀을 한 가지씩 얘기하면서 그것을 핸드폰 동영상으로 촬영을 한다. 왜 그럴까? 나중에 배신하는 친구가 생길 때 그것을 협박용으로 사용하기 위함이다.

처음 그 얘기를 들으며 ‘그 아이들이 친구가 맞나요?’라고 되물었다. 돌아온 대답은 학교에서 아무런 문제를 일으키는 아이들도 아니고 일진 무리도 아니고 그냥 평범한 또래집단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그 아이들이 ‘우리 학교 애들 다 그렇게 해요’라고 했다고 한다. 아무도 믿지 못하는 아이들, 그래서 두려운 아이들, 끊임없이 친구의 약점을 수집하여 자기의 보호막을 만들어야 되는 아이들.

이렇게 하는 것이 마냥 철모르는 아이들의 장난일 뿐일까? 언제 내 친구가 배신을 하고 나의 뒤통수에 칼을 꽂을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아이들은 늘 긴장해야 되고 예민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 긴장과 예민은 서로를 경계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 경계는 ‘우리’라는 좋은 말을 배타성 강한 단어로 변질시킨다. 그래서 뭐든지 ‘우리’와 다른 것이 있다면 공격해야 되고 처단해야 되는 대상이 돼 버린다. 그 ‘우리’에 들어가는 것도 힘들지만 그 ‘우리’를 지키는 것도 만만치 않게 힘들다. ‘우리’와 다른 의견을 얘기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것이 쌓여서 더 이상 참지 못해 누군가에게 자기의 속상함을 얘기했다가 뒷담화를 했다는 오해로 불거져 왕따로 이어지는 것이다. 이 오해는 인간을 가장 궁지로 모는 단어다. 궁지에 몰린 친구를 모두들 숨죽여 지켜볼 뿐이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원인이 무엇이니를 캐고 있기에는 현실이 어려운 상황이다. 이것이 현재 아이들의 문화고 학원문화라면 그 의식을 바꾸기 위한 장기간 노력이 뒤따라야 할 것이다. 친구의 약점은 도와주고 지지해줘야 하는 것이라는 것, 다음 피해자는 침묵하는 나라는 것, 친구를 괴롭히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라는 것, 다수와 다른 내 의견을 얘길 해도 안전할 수 있는 것, 다른 것에 대한 관심과 수용, 오해나 의견 대립이 있을 때 그 일과 상관이 없는 중재자가 있는 상태에서 함께 얘기 나눌 수 있는 장을 마련하고, 왕따나 친구들과 관계가 소원해진 아이들이 머물 수 있는 안전지대를 만들어 쉬어 갈 수 있도록 하는 것, 전학생에 대해서 반 아이들이 다 같이 환영 이벤트를 하는 등 어른들이 아웃라인은 만들어 주면 아이들이 직접 노력하여 참여하게끔 했을 때 의식도 바뀌고 문화도 뒤따라 바뀔 것이다.

저작권자 © 양산시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