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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이운용교수의 인도 비즈니스
불교의 흥망은 카스트 제도와 관련

양산시민신문 기자 입력 2013/07/09 11:57 수정 2013.07.09 11:57
⑦ 인도와 불교 - 2




↑↑ 힌두교도들의 축제 한 장면
불교와 힌두교는 서양과 중동의 배타적인 종교관으로는 믿을 수 없을 만큼 관용적이다. 불교와 힌두교는 자신의 발전을 위해 필요하다고 여기면 다른 편으로부터 차용하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불교가 자신의 새 와인을 오래된 병에 넣듯이, 힌두교는 새 와인을 받아들이고 보전하기 위해 병을 다시 디자인했다”고 인도 학자가 표현한 것을 본 적이 있다. 자기와 다르다고 할지라도 주변의 모든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인도인들의 생활 태도를 지켜 본 필자는 이 표현이 아주 적절한 비유라고 생각한다.

↑↑ 힌두교도들의 최대 성지인 바라나시에서는 매년 100만명에 이르는 순례자들이 갠지스강을 찾아 목욕재계를 한다.
무슬림에 의해 해체된 불교

힌두교와 불교는 약 1천500년이라는 긴 공존상태를 지속하는 동안 몇 가지 차이점이 발생했는데, 가장 큰 차이점은 불교는 함께 생활하고 공부하는 승려집단(sangha) 시스템을 유지했다는 점이다. 7세기경 하르샤 왕조의 지원을 받은 날란다 사원(대학의 기능도 함)과 빨라 왕조의 지원을 받은 오단타뿌리, 비끄라마실라 사원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승려집단은 당시 사회를 유지하는 일종의 리더 집단 역할을 했다고 한다. 인도의 비끄라마실라는 이제 사라졌지만 비끄라마실라의 기능을 지금도 보존하고 있다는 것이 티벳 승려단이다. 티벳 승려단이 현재 국가의 리더 역할을 하는 것으로 미루어 당시 인도에서 이들 승려집단의 역할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이들은 모두 비하르 일대에 있던 승려집단의 거주공간이자 수행하는 장소였는데, 10세기 이후 무슬림 침입자들이 자신들의 통치기반을 확고히 하기 위해 이곳을 파괴하고 승려집단을 해체함으로써 불교가 인도사회에서 점차 사라지게 되었다고 학자들은 주장한다. 즉 도덕성이 붕괴됐거나 종교생활이 타락하여 불교가 쇠퇴한 것은 아니라는 의미다.

↑↑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전시했던 인도 불교 석상
마우리아 왕조시대의 행정언어는 쁘라크리트어(語)이다. 아쇼카 대왕의 기념비문이나 동판 등은 물론 불교 관련 기록들도 쁘라크리트로 쓰이다가 나중에 산스크리트어(語)로 바뀐다. 불교의 교리도 초기에는 중세 인도아리아어의 하나인 빨리어로 쓰였으나 기원 후로 넘어올 무렵 산스크리트어를 사용하게 된다. 기원 후 500~1200년 동안 광범위하게 사용됐던 산스크리트어 역시 무슬림 시대가 시작되면서 세력이 약화되었는데 이 역시 불교의 쇠퇴와 어느 정도의 연관이 있다고 보인다.

암베드카와 불교의 부활

독립 이후 인도 불교에 대해서는 닥터 암베트카(Bhimrao Ramji Ambedkar : 1891년 4월 14일~1956년 12월 6일)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카스트에도 포함될 수 없는 아웃카스트, 즉 불가촉천민 출신이다. 불가촉천민을 간디는 신의 자식이라는 뜻으로 하리잔이라고 불렀고 남인도에서는 흔히 쓰이는 달리트(Dalit)라고 부른다. 암베드카는 천민 출신으로서는 최초로 정부지원으로 해외에 나가 경제학 및 법학 박사를 받은 자로서 봄베이에 돌아온 후 카스트 폐지 운동에 앞장섰다. 1947년 8월 15일 인도가 독립하자 법무부 장관이 돼 인도헌법을 기초하였고, 이때 카스트 차별금지, 대학 및 공무원 자리의 일부를 천민에게 할당하도록 헌법에 명시했다.

↑↑ 인도 불교의 8대 성지 중 하나인 쿠시나가르에 있는 열반당 내부 모습. 5세기경 조성된 부처님의 열반상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으로도 인도 사회의 뿌리 깊은 카스트 차별은 사라지기 힘들다고 보고, 그는 모든 인간의 평등을 주장하는 불교를 믿게 된다. 인도 중부 내륙 도시 낙뿌르에서 그가 수 많은 불가촉천민을 거느리고 함께 불교로 개종한 이후 거의 3백만명의 달리트들이 그를 따라서 불교로 개종했다고 한다. 그는 혁신적인 불교운동을 통해 ‘피를 흘리지 않은 혁명’을 이루었다고 평가되었으며, 후에 인도 국민으로서는 최고의 훈장인 Bharat Ratna를 받았다. 그는 사라진 불교를 현대에 되살린 새로운 불교의 지도자로 추앙받고 있다.

불교의 탄생, 쇠퇴, 부활
모두 카스트 차별과 관련

이처럼 불교의 탄생, 쇠퇴 그리고 부활의 과정을 살펴보았다. 여기에는 한가지 공통 요인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바로 계급에 의한 차별이다. 힌두교 사회에서 카스트 계급에 의한 차별을 철폐하고자 평등을 이념으로 탄생한 것이 불교였다. 

↑↑ 불교의 탄생과 쇠퇴·부활은 모두 카스트와 관련이 있다. 사진은 도로변 과일 노점상
그리고 인도를 점령한 이슬람 지배층에 의해 평등을 주장하는 불교 승려단이 해체되는 과정에서 불교가 쇠퇴한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에는 불교의 평등이념에 대해 반감을 가진 상층 카스트들의 역할도 있었던 것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당시 피지배층의 리더그룹에는 불교 승려단뿐만 아니라 더 큰 힌두교 리더그룹도 있었는데 불교 승려단만 사라진 것은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힌두사회 지배계층인 상위 카스트는 평등을 주장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새로이 인도를 지배해야 하는 이슬람 지배계층의 생각과 반하지 않았을 것이다. 즉 이슬람 지배층은 힌두 지배층을 통해 인도 전체를 통제하는 것이 필요했고 힌두 지배층은 이에 편승한 것으로 보인다. 영국이 인도를 지배할 때도 인도 사회의 기존 지배층인 상위 카스트들의 기득권을 인정하고 그들을 통해 인도 하층민을 통치 한 것을 보아서도 알 수 있다.

불교의 부활 역시 암베드카에 의한 카스트 차별 철폐의 최후 수단으로서 불교로의 개종이 그 계기가 된 것이다. 결국 인도 불교는 지배계층과 피지배계층간의 대립 과정에서 탄생, 쇠퇴, 부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운용 교수


한국외대 인도어과
한국외대 지역대학원 정치학 석사
인도 첸나이무역관 관장
한국인도학회 부회장(현)
영산대 인도연구소장(현)
영산대 인도비즈니스학과 교수(현)
영산대 기획처장(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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