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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양산의 어제와 오늘
역 소재지 영화(榮華)는 사라지고 낙후된 원도심 남아

양산시민신문 기자 입력 2013/07/30 11:14 수정 2013.07.30 02:14
⑧ 역사 속에 명멸한 물금









 
↑↑ 정동찬
양산향토사연구소장
 

삼랑진에서 낙동강 하류는 예부터 황산강으로 불리었다. 강 너머 김해 상동을 연결하던 나루가 있어 황산진(黃山津)으로 알려진 물금은 신라 때부터 자연촌락을 이루고 살았다. 지금의 서부리 690번지 일원에 있었던 것으로 알려진 황산역(黃山驛)은 신라 소지왕 9년(487년) 우역제가 실시된 이래 수해로 훼손된 1857년까지 1천400년 동안 경상도 16개 산하 역을 관할하는 국가통치의 중요한 역할을 해온 곳이다.





↑↑ 1959년께 화제고개에서 내려다 본 물금 전경
황산역 터에서 낙동강을 끼고 계속 올라가면 삼랑진과의 경계인 작원관에 이른다. 이 길은 영남대로의 일부분인데 화제로 가는 길은 절벽 아래에 선반을 달 듯 나무로 난간을 만들어 통로로 이용했기에 잔도(棧道)라고 불렸다. 양산시에서는 ‘황산베랑길 복원사업’을 추진하면서 이 구간을 낙동강변 자전거길로 조성했다.
원동면과 함께 서면으로 불리다가 상서면으로 분리된 물금은 1936년 물금면으로 개칭됐다. 1983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교리, 유산리, 어곡리를 당시 양산읍에 떼어 준 물금은 1996년 양산이 시로 승격되면서 읍으로 승격됐다.

↑↑ 1980년대 물금 전경, 철도 건너편 농경지는 대부분 4대강 사업으로 수변공원이 됐다.
상전벽해(桑田碧海)와 같이 지금은 화려한 신도시로 변한 그곳엔 모두가 탐내는 곡창지대가 펼쳐져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낙동강의 범람으로 자주 물에 잠겨 메기들이 침만 흘려도 물에 잠긴다고 해 ‘메기들’이라는 슬픈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지만 1900년대 들어 대대적인 경지정리를 통해 양산의 대표적인 농경지로 다시 태어났다.

당시 양산읍내에서 물금으로 가는 길목엔 종고개가 있었다. 지금의 범어리와 가촌리 경계 부근인 종고개는 메기들 방향으로 길게 뻗어내린 청룡등이라는 야산을 끼고 있었는데, 이곳에서 조선시대 메기들에 관한 민중의 역사가 담긴 비석이 발견된 것은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된다.

1864년 조선 고종 때 일이다. 습지에 가까운 불모의 땅에 매년 과다한 농지세가 부과되자 이를 견디다 못한 농민들이 관아에 탄원했지만 해결되지 않자 직접 한양으로 가서 억울함을 호소하고 면세를 청하는 서류를 제출했다. 다행히 이를 받아들인 호위영 대장 정원용이 관할 군수와 관찰사에게 상세한 조사를 지시해 검토한 연후, ‘메기들에 대하여 영구히 면세하라’는 영을 내리게 된다. 양산향토사연구회가 주민의 제보를 받고 청룡등에서 발견해 복원한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는 바로 이러한 공직자들의 은공을 잊지 못해 메기들 농민들이 자발적으로 세운 공덕비이다.

↑↑ 1960년대 종고개 (지금의 황전아파트 사거리에서 가촌휴먼시아로 넘어가는 길)
경부선 철도가 놓이면서 물금역이 개설되자 물금리 일대는 군 소재지보다 더 번성하기도 했다. 경부고속도로가 준공된 1970년대 이전, 특히 1950~60년대 부산으로 가는 길은 대부분 철도를 이용했기 때문이다. 중ㆍ고등학교를 부산으로 유학 갈 수 있었던 것도 물금역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화제로 넘어가는 고개에는 철광석을 캐는 물금광산이 있었다. 지금의 물금취수장 쪽으로 내려가는 토교 아래 산비탈에 자리한 광산은 1960년대 초에 개발돼 연간 10만톤가량의 철광석을 생산하며 명성을 날렸지만 1980년대 들어 폐광되고 지금은 레미콘 공장이 들어서 있다. 광산 인근에는 신라 문장가 고운 최치원 선생이 절경을 노래했던 임경대(臨境臺)가 있던 곳이다. 지금도 해가 질 무렵 이곳에서 낙동강을 바라보면 그 아름다운 경치가 한눈에 들어온다.

↑↑ 1960년대 한창 성업중이던 물금광업소
물금의 옛 영화가 쇠락하게 된 것은 물금역의 기능이 줄어든 것과 궤를 함께한다. 도로교통이 양산읍내를 중심으로 재편되면서 역전은 쇠퇴하기 시작했다. 물금리 4개 마을은 기존취락지 보호라는 명분 아래 신도시 조성사업에서도 제외돼 낙후된 원도심 문제가 심각하게 대두되기 시작한다. 시에서는 정주권사업 등을 통해 자체 발전을 꾀하고 있지만 한번 밀려난 관심을 회복하기는 쉽지 않은 법이다.

물금 주민들의 애환은 지난 정부에서의 4대강 사업으로 증산 앞 하천부지의 농경지를 잃게 되면서 더욱 시름이 깊어졌다. 낙동강 하류의 치수사업으로 홍수도 거의 없어졌는데 농사를 짓던 농민들은 그저 일손을 놓게 돼 아쉽기만 하고 이것은 나중에 채소값 상승의 원인으로 지목되기도 했다.

↑↑ 1960년대 증산마을 앞에서 모내기를 하고 있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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