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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시민신문

[화요살롱] 개성상인과 기업가정신..
오피니언

[화요살롱] 개성상인과 기업가정신

양산시민신문 기자 입력 2013/07/30 11:18 수정 2013.07.30 11:20




↑↑ 허광욱
영산대학교 국제무역학과 교수
현대사회에서 기업가는 신상품 개발과 새로운 생산방식의 도입, 신시장 개척 등 우리 사회의 발전과 국가의 경제적 성장을 위한 큰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피터 드러커(Peter Ferdinand Drucker)는 변화를 탐구하고 변화에 대응하며, 변화를 기회로 이용하는 사람을 기업가로 정의했다. 일반적으로 기업가란 남들이 발견하지 못한 사업기회를 찾아내 자신의 책임 하에 필요한 자원을 조달해 사업을 시작하는 사람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기업가정신을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기업가정신의 개념은 상황이나 시대에 따라 변할 수 있지만, 일반적으로 기업가들이 마땅히 갖춰야 할 자세나 정신, 즉 새로운 사업에서 야기될 수 있는 위험을 부담하고, 어려운 환경을 헤쳐 나가면서 기업을 성장시키려는 뚜렷한 의지를 말한다. 미국의 경제학자 조지프 슘페터(Joseph Alois Schumpeter)는 미래의 불확실성 속에서도 장래를 정확하게 예측하고 변화를 모색하는 것이 기업가의 임무이며, 이를 실천하는 것이 기업가정신이라고 했다. 그는 새로운 생산방식과 새로운 상품개발을 기술혁신으로 규정하고, 기술혁신을 통해 창조적 파괴(creative destruction)에 앞장서는 기업가를 혁신가로 봤다. 조동성은 기업가정신의 4대 요소로 도전적 위험감수 능력, 혁신력, 장기적 사고력, 국제화 의욕을 열거하고 있다.

우리사회의 변화를 주도한 많은 기업가들이 있지만, 필자는 상인집단이면서도 혁신을 통한 시대의 변화를 선도한 개성상인을 소개하고자 한다. 개성상인은 고려의 수도였던 개성에 중심을 두고, 전국적 규모의 상업조직인 송방(松房)을 설치해 앞선 상술로 일제 강점기 초기까지 하나의 경제적 세력권을 이뤘던 우리 역사상 대표적 상인집단이다. 개성상인의 활동은 고려시대부터 시작됐으며, 당시의 개성은 정치의 중심지였을 뿐만 아니라 무역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즉, 개성은 당시 국제무역항이었던 예성강 입구의 벽란도를 거점으로 외국사신에 의한 공무역(公貿易)과 외국상인에 의한 민간무역(私貿易)이 번창해 상업도시로서 발달했다.

개성상인의 상업 활동을 통해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첫 번째 기업가정신은 도전정신과 합리성이다. 조선전기의 상업구조는 자유경쟁이 없는 시전중심의 상업체제였다. 이러한 때 개성상인은 시전상업보다는 전국의 시장을 무대로 한 상업 활동과 국제무역에 집중했다. 물론 서울의 시전상인처럼 금난전권을 소유한 시전을 경영한 상인들도 있었다. 개성상인은 행상단을 조직해 활동했고, 조선후기에는 차인(差人), 서사(書士), 수사환(首使喚), 사환(使喚) 등으로 구성되는 상업사용인 체제를 정립하기도 했다. 개성상인은 이러한 상업조직을 기반으로 해서 전국의 주요거점 지역에 송방(松房)을 설치해 당해 지역의 상품유통을 담당하게 했다.

두 번째는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들 수 있다. 개성상인은 우리민족 고유의 복식부기법인 송도사개치부법(松都四介置簿法)을 고안했으며, 신용에 기초한 금융거래기법인 시변제(市邊制)와 신용화폐의 일종인 환과 어음(於音)제도를 고안했다. 시변제는 자금의 대여자와 차용자가 중개인을 매개로 물적 담보 없이 신용을 바탕으로 대차관계를 맺는 제도를 말하며, 환과 어음제도는 동전운송의 비효율성과 원거리 운송의 위험성을 극복하기 위해 사용한 신용화폐의 일종이다.

또한 개성상인은 국내 상업과 국제무역을 통해서 축적한 자본을 생산부문에 과감히 투자했는데, 이들의 생산부분에 대한 투자 중에서 가장 두드러진 분야가 인삼재배업과 홍삼제조업이었다. 이들은 정부의 허가를 받지 않고 광산을 채굴하는 잠채광업에 투자하는가 하면, 인삼의 확보를 위한 선대제적 경영을 시도하기도 했다.

세 번째는 국제화를 시도했다는 점이다. 조선시대에는 개성상인과 같은 민간상인(私商)들의 해외무역은 엄격히 금지됐고, 외국과의 교역은 명나라와의 조공무역, 일본과의 왜관무역 등 일종의 정부 주도 무역인 관무역(官貿易)에 한정됐다. 하지만 17세기 후반 이후 청나라 및 일본과의 무역이 활발해지면서 개성상인은 의주의 만상(灣商), 동래의 래상(萊商)과 함께 국제무역을 주도하는 상인이 됐다. 또한 개성상인은 정부의 허가를 통해서 이뤄지는 공식적인 무역 이외의 비공식적 무역인 밀무역(密貿易)에도 적극적이었다. 개성상인이 조선 후기 대표적인 사상세력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삼포경영과 홍삼제조와 함께 국제무역에서 막대한 수익을 창출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최근 남양유업의 밀어내기식 영업행태로  ‘갑을관계’가 우리 사회의 관심사항이 되고 있다. 갑을관계의 폐해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모든 사회구성원의 노력이 필요하지만, 특히 대기업가들의 약자에 대한 배려와 관심이 필요하다. 우리나라 기업가들이 앞서 언급한 개성상인의 기업가정신을 본받아 동반성장과 상생의 기업경영을 추구하고, 도전정신과 혁신적 아이디어를 통해 우리 사회의 갑을관계의 폐해를 해소하고 변화와 개혁을 주도하는 데 일익을 담당하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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