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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골목상권의 강소업체
“옛날 구둣방에 머물러서는 안되죠. ‘혁신’ 해야죠”

엄아현 기자 coffeehof@ysnews.co.kr 입력 2013/08/20 10:27 수정 2013.08.20 10:30
구두수선점 혁신제화






옛 시외버스터미널 길목에서 2평 남짓 구둣방으로 출발
자동화기계 개발, 밑창 제작, 수입 유통 등 쉼없는 도전
‘신발에 관한 모든 것’을 해결해 주는 전문점으로 ‘우뚝’


이런 우스갯소리가 있다. 어느 의사가 낡은 구두 한 켤레를 들고 구둣방을 찾아갔다. 구두수선공은 이리저리 살펴보아도 도저히 고칠 수가 없었다. 뒤축을 갈거나 꿰맨다고 될 일이 아니었다. 결국 구두를 돌려주며 “2천원만 주시오”라고 했다. 의사가 버럭 화를 내며 “거 참, 고치지도 못하면서 뭔 돈을 받는 거요?”라고 소리쳤다. 그러자 의사의 두 눈을 빤히 쳐다보던 그가 말했다. “당신도 병을 고치지도 못하면서 꼬박꼬박 진찰비는 받지 않소?”

말이야 바른 말이지 사실이 그렇지 않은가. 중요한 일과 허드렛일의 구별을 누가 해 놓았나. 사람을 고치는 일과 구두를 고치는 일 모두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직업의 귀함과 천함을 따지는 구시대적 사고는 이제 안 통한다. 더욱이 이제부터 소개하는 구두수선공의 일과 인생 이야기를 들으면 ‘직업에 귀천이 없다’는 진리를 새삼 떠올리게 될 것이다.

1991년 터미널서 시작한 구둣방 ‘성황’


양산시 서일동 1길에 ‘혁신제화’라는 상호를 내건 구두수선점이 있다. 주인공 김상돈(53) 씨의 일터다. 가게는 2007년 오픈했지만 혁신제화의 역사는 훨씬 더 오래됐다. 여느 구둣방과 같이 2평 남짓한 작은 구두박스에서 출발했다.

김 씨는 1991년 당시 양산시외버스터미널 한켠에 구둣방을 차렸다. 5년 전부터 부산 사상터미널에서 구둣밥을 제법 먹었기에 자신 있었다. 더욱이 양산의 중심이자 최고 번화가인 도심 한가운데 있는 터미널이기에 위치도 끝내줬다.

“하루 손님이 200명이 넘었죠. 출퇴근 하는 사람, 여행객, 시장 보러 나온 사람 등등 터미널에 항상 사람들로 바글바글했죠. 1년 만에 직원을 두기 시작했어요. 혼자서는 그렇게 많은 손님들을 감당할 수 없었거든요. 신발 걷어오는 직원, 구두만 닦는 직원, 수선만 하는 직원이 따로 필요했을 정도였죠”

구둣방 성공이 좋은 위치 때문만은 아니었다. 당시 터미널 근처에만도 5군데가 넘는 구둣방이 있었기 때문에 경쟁이 치열했다. 전략이 필요했다. 김 씨의 도전기는 그때부터 시작됐다.

“구두수선업을 하찮은 직업으로 여기는 분위기는 그때가 더 심했죠. 그래서 생각했어요. 스스로 격을 높이자. 하나의 전문직으로 인정받자고 다짐했죠. 독일로 출장을 다녀오는 양산의 한 기업 사장님께 신발카탈로그 하나 구해달라고 부탁했어요. 읽지도 못하는 자료지만 사진과 그림만 보고 열심히 공부했어요”

구두 흠집에 먹물 칠하고 구두약 입히고 망치로 구두굽을 뚝딱뚝딱하는 정도로는 안됐다. 카탈로그에서 본 자동기계 설비가 떠올랐다. 하지만 2평 남짓한 구두박스가 감당하기에는 기계 덩치가 너무 컸다. 그래서 개발이라는 것을 했다. 작지만 수선기능을 모두 갖춘 기계를 만들어냈다. 어엿한 발명품이다. 특허등록까지 마쳤다.

“확실한 차별화였죠. 우리 가게에 신발을 가져오면 못 고치는 게 없다고 소문이 났어요. 그러다 보니 우산이나 그릇 같은 것을 가져와 좀 고쳐달라고 하는 손님도 있었어요. 과장 조금 넣어서 당시 양산에 사는 사람 중 우리 가게에 신발 한 번 안 맡겨본 사람 없을걸요? 하하”

터미널 이전 ‘망연자실’… 위기를 기회로

그런데 2000년부턴가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터미널이 신도시로 이전한다는 것이다.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해 그냥 흘려들었다. 어느 지자체가 그 비싼 신도시 땅에다 터미널을 지을까. 하지만 2007년. 그 말도 안되는 일이 벌어졌다. 굳게 닫혀버린 터미널 건물을 보고 망연자실했다.

“혁신제화가 이대로 무너질 수는 없죠. 위기를 기회로 삼아 터미널 근처에 지금의 가게를 열었죠. 2평에서 20평으로 10배나 넓혔죠. 하지만 몇몇 단골을 제외하고는 손님이 딱 끊겨 버리더라고요. 요즘말로 정말 ‘멘붕’이었어요”

이제 믿을 것은 자신의 실력뿐이었다. 김 씨는 또다시 연구에 매진했다. 등산화 수선을 시작한 것이다. 등산화는 신발제작 원리를 정확히 이해하고 정교한 접착기술이 있어야만 도전할 수 있다. 등산화 밑창을 직접 공장에 주문 제작했다. 성공이었다. 김 씨가 주문 제작한 등산화 밑창을 김 씨에서 다시 주문하는 가게가 생겨났 다.

“시장이 넓어진 거죠. 구두수선만을 하는 것이 아니라 ‘신발에 관한 모든 것’에 접근하기 시작했어요. 일본에서 수입한 깔창을 전국 구두빨래방에 유통하기도 하고, 호주에서 가죽염색제를 수입해 팔아보기도 했어요. 발냄새 제거제, 구두클리너 등 신발관리용품도 판매했죠”

수선실력, 고객관리 등 차별화전략 적중

고객관리도 철저해졌다. 단골고객들에게는 명절 안부문자, 새로운 상품 소개 문자 등을 수시로 보내기 시작했다. 구두수선점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마케팅 전략이었다.

“영업방법을 바꿔야 했죠. 좋은 상권에서는 가만히 있어도 손님들이 몰리지만 이제는 손님들이 일부러 찾아오게 만들어야 했으니까요. 홈페이지(www.055363 5755.com)를 운영하게 된 것도 그 이유였죠. 홈페이지를 통해 구두수선에 대한 많은 정보를 제공하고 혁신제화만의 기술을 자랑하기도 했어요”

꾸준히 찾는 단골도 다시 생겨났다.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혁신제화의 기술을 믿고 불편함을 감수하면서까지 일부러 찾아오는 손님들이다. 때문에 실력을 더 쌓아야 했다. 실망감을 줄 수 없기 때문이다. 등산화와 워킹화는 물론 브랜드 운동화, 명품 구두, 롱부츠 단줄임에 장애우보장구신발 수선까지…. 신발계의 맥가이버가 다 됐다. 1~2년 단골 손님이 5~10년 단골 손님이 되더니 이제는 자그마치 23년 단골 손님까지 생겼다,

“‘혁신제화’라는 가게 이름은 95년도에 지었어요. 혁신(革新)은 ‘새로움’을 뜻하기도 하지만, ‘가죽 신발’로 풀이되기도 하고 ‘이노베이션’이라는 영어 단어로도 의미있죠. 당시에는 참 파격적인 이름이었는데, 지금은 어째 좀 흔한 것 같죠? 하지만 이 가게 이름 덕분에 제가 무언가 계속 도전했던 것 같아요. 이름이 혁신제화인데 옛날 구둣방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되니까요. 하하”

문의 363-5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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