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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양산의 어제와 오늘
양산의 과거와 오늘을 그대로 보여주는 영대교

양산시민신문 기자 입력 2013/09/03 10:36 수정 2013.09.03 01:43
⑨ 교동과 영대교





↑↑ 정동찬
양산향토사연구소장
영대교(永代橋)는 그냥 영대교가 아니다. 오랜 세월 동안 물금과 양산을 연결하는 유일한 교량이었기 때문에 지역의 발전상을 시대별로 보여주는 산 증인이 됐다.

조선시대 과거시험을 보러가는 유생들이 다녔던 영남대로는 동래에서 출발해 물금의 황산잔도를 넘어가야 했다. 또 교통과 지방행정의 구심이 되는 역참(驛站)이 물금에 있었다. 일제강점기 이후에는 경부선 철도가 놓이고 물금역이 생겨났다. 그 시대에 물금은 양산(지금의 원도심 지역)보다 더 활발한 곳이었다.

영대교를 건너면 처음 만나는 동네가 교동이다. 마을 이름에서 알 수 있듯 교동에는 향교가 있다. 19세기 초에 향교가 설치됐는데 이전에는 교리마을 이름이 곡포(曲浦)리였다. 당시 이곳은 지금과는 달리 춘추원 앞쪽으로 S자 모양으로 옴팍하게 들어갔다 나오는 형상을 하고 있어 곡포라는 지명이 붙었다고 한다.

↑↑ 일제강점기에 통나무 위에 자갈과 흙을 덮어 만든 곡개다리는 양산읍내와 물금을 연결하는 양산천의 유일한 다리였다. 해방 이후 콘크리트 교량으로 건설되면서 영대교라는 이름이 붙었다.
곡포에서 읍내로 나가는 길목에 하천을 건너는 나무다리가 있었는데 곡포다리라 했다. 옛 문헌에 따르면 매번 큰물이 있을 때면 다리가 휩쓸려 가곤 해 주민들이 동원돼 복구하곤 했다고 한다. 그만큼 위험하기도 해서 행인을 업어서 건네주는 월천(越川)꾼이 있었다고도 한다.

곡포교를 한자로 풀어쓰면, 포(浦)는 개 포자(字)로 물가를 뜻하고, 교는 다리를 말한다. 즉 풀어쓰면 곡개다리가 된다. 이것이 후일 변해서 ‘국개다리’가 된 것이다. 양산이나 물금이 고향인 사람들은 어릴 때 한 번은 ‘국개다리 밑에서 주워왔다’는 놀림을 받은 기억이 있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일제강점기에는 통나무 교각 위에 흙과 자갈을 덮어 길을 만들어 자동차와 사람이 다녔다.
↑↑ 몇 번의 수해를 당한 뒤 1983년 재가설된 영대교
해방 이후 1949년 3월에 나무다리를 철거하고 콘크리트 교량을 만들어 영대교라 이름붙였다. 국개다리에서 영대교라는 현대식 이름으로 바뀌었지만 요즘처럼 튼튼한 다리는 못 되었다. 몇 번의 재해를 입는 등 태풍으로 인한 피해가 발생해 교량 상판을 다소 높인 형태로 1983년 재가설됐다. 이 또한 신도시 건설로 인해 인구가 증가하면서 다리를 이용한 교통량이 크게 늘어남에 따라 2009년 현재의 왕복 6차선 교량으로 다시 태어났다. 설계공모를 통해 예술적이고 기능적인 초현대식 교량이 놓이고 인근의 음악분수가 어우러져 아름다운 야경을 연출하고 있다.
↑↑ 2009년 예술성과 기능이 복합된 아름다운 다리로 태어난 영대교는 최근 국내영화 촬영현장으로 각광을 받고 있다.


영대교에서 남쪽으로 양산천을 따라 내려가면, 양산역 인근에 큰 보(洑)가 설치돼 있다. 신도시 조성 전 수백만평에 달하는 메기들 너른 평야에 농업용수를 공급하기 위한 시설이다. 보 인근에는 하천 양 옆으로 너른 공터에 수양버드나무가 늘어져 아이들이 놀기에 그저그만이었다. 일명 낙차라고 했는데 1950~60년대 어린시절을 보낸 아이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낙차에 나가 제방 언덕에 소를 풀어놓고 자맥질로 여름 한나절을 보낸 기억이 있을 것이다. 더러 투망을 잘 하는 형들이 잡아온 은어나 피라미들로 양푼이에 추어탕도 끓여먹곤 했다.

↑↑ 1980년대 춘추원 입구에는 가게와 음식점이 계단 양쪽에 있었다.
영대교 건너에는 오래된 교육시설인 향교가 자리잡고 있다. 시민공원인 춘추원은 변변한 휴식공간이 없었던 1900년대 시민들에게 유일한 쉼터요 나들이터였다. 낙차와 더불어 읍내 학교들의 소풍지로 각광을 받았다. 그동안 수 차례의 정비사업으로 다양한 편의시설과 순국선조 추모시설이 자리하고 있지만 원래는 삼조의열이 유일했다.

해방 후 민족사관이 절실했던 시대상에 따라 우리 고장에서도 춘추계가 조직돼 유지와 선비들이 모여 충렬의 선조 비를 한데 모아 단을 만들었다. 신라 삽량주 간(干) 박제상 공, 고려의 김원현 양주 방어사, 조선 때 군수 조영규 등 읍내 여기저기에 방치돼 있던 삼조의열(三朝義烈)의 비(碑)를 옮겨 장충단을 만들고 제를 올렸다. 삼조의열단 뒤로 조금 올라가면 한국전쟁 전몰군경을 기리는 충혼탑이 있다.

↑↑ 2000년대 들어 도로가 확장되면서 춘추원 입구도 재단장했다.
최근 들어 지역의 향토사학자들이 주축이 된 양산향토사연구회(나중에 문화원 산하로 들어가 향토사연구소로 명칭을 바꿈)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우리 조상들의 기록과 유적을 찾아 꾸준히 노력해 온 결과 삼조의열을 비롯해 임진왜란 당시의 공신, 항일독립운동유공자들까지 정리해 위패를 합동 보관하는 충렬사를 건립하기에 이르렀다. 양산시가 20억원 가까운 예산을 지원해 춘추원의 머리라 할 수 있는 백로봉 위쪽에 사당과 재실 등 5동의 건물을 축조하여 모두 70위의 위패를 봉안하게 됐다.

이로써 교동은 향교와 더불어 충렬공원까지 완비됨으로써 명실공히 양산의 문화적 뿌리로 거듭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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