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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동찬 양산향토사연구소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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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과거시험을 보러가는 유생들이 다녔던 영남대로는 동래에서 출발해 물금의 황산잔도를 넘어가야 했다. 또 교통과 지방행정의 구심이 되는 역참(驛站)이 물금에 있었다. 일제강점기 이후에는 경부선 철도가 놓이고 물금역이 생겨났다. 그 시대에 물금은 양산(지금의 원도심 지역)보다 더 활발한 곳이었다.
영대교를 건너면 처음 만나는 동네가 교동이다. 마을 이름에서 알 수 있듯 교동에는 향교가 있다. 19세기 초에 향교가 설치됐는데 이전에는 교리마을 이름이 곡포(曲浦)리였다. 당시 이곳은 지금과는 달리 춘추원 앞쪽으로 S자 모양으로 옴팍하게 들어갔다 나오는 형상을 하고 있어 곡포라는 지명이 붙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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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강점기에 통나무 위에 자갈과 흙을 덮어 만든 곡개다리는 양산읍내와 물금을 연결하는 양산천의 유일한 다리였다. 해방 이후 콘크리트 교량으로 건설되면서 영대교라는 이름이 붙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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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포교를 한자로 풀어쓰면, 포(浦)는 개 포자(字)로 물가를 뜻하고, 교는 다리를 말한다. 즉 풀어쓰면 곡개다리가 된다. 이것이 후일 변해서 ‘국개다리’가 된 것이다. 양산이나 물금이 고향인 사람들은 어릴 때 한 번은 ‘국개다리 밑에서 주워왔다’는 놀림을 받은 기억이 있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일제강점기에는 통나무 교각 위에 흙과 자갈을 덮어 길을 만들어 자동차와 사람이 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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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몇 번의 수해를 당한 뒤 1983년 재가설된 영대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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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9년 예술성과 기능이 복합된 아름다운 다리로 태어난 영대교는 최근 국내영화 촬영현장으로 각광을 받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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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대교에서 남쪽으로 양산천을 따라 내려가면, 양산역 인근에 큰 보(洑)가 설치돼 있다. 신도시 조성 전 수백만평에 달하는 메기들 너른 평야에 농업용수를 공급하기 위한 시설이다. 보 인근에는 하천 양 옆으로 너른 공터에 수양버드나무가 늘어져 아이들이 놀기에 그저그만이었다. 일명 낙차라고 했는데 1950~60년대 어린시절을 보낸 아이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낙차에 나가 제방 언덕에 소를 풀어놓고 자맥질로 여름 한나절을 보낸 기억이 있을 것이다. 더러 투망을 잘 하는 형들이 잡아온 은어나 피라미들로 양푼이에 추어탕도 끓여먹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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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0년대 춘추원 입구에는 가게와 음식점이 계단 양쪽에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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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후 민족사관이 절실했던 시대상에 따라 우리 고장에서도 춘추계가 조직돼 유지와 선비들이 모여 충렬의 선조 비를 한데 모아 단을 만들었다. 신라 삽량주 간(干) 박제상 공, 고려의 김원현 양주 방어사, 조선 때 군수 조영규 등 읍내 여기저기에 방치돼 있던 삼조의열(三朝義烈)의 비(碑)를 옮겨 장충단을 만들고 제를 올렸다. 삼조의열단 뒤로 조금 올라가면 한국전쟁 전몰군경을 기리는 충혼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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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0년대 들어 도로가 확장되면서 춘추원 입구도 재단장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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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써 교동은 향교와 더불어 충렬공원까지 완비됨으로써 명실공히 양산의 문화적 뿌리로 거듭나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