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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아이들 속에 보육교사가 보이지 않는다. 살펴보니 방 한 켠에서 산더미 같은 서류와 씨름하는 중이다. 각종 법과 규정이 적혀있는 책을 끼고 평가인증 서류와 재무회계 서류 등을 정리한다고 정신이 없다.
“요즘은 내가 마치 법학도나 회계사가 된 것 같아요. 에휴~ 제발 아이들만 돌봤으면…” 보육교사가 한숨짓는다.
아동학대, 보육료 부정수급, 보육교사 블랙리스트, 인가 권리금….
최근 발생한 어린이집 관련 사건ㆍ사고들이다. 당연히 비난여론도 잇따르고 있다. 수많은 보육시설 종사자들이 고개를 숙이고 있다. 사건ㆍ사고의 장본인이 아니더라도 싸잡아 욕하는 우리사회의 풍토때문이다.
동시에 억울함도 호소한다. 운영이 불가능하도록 만드는 불합리한 법도 문제인데, 그 법에 맞춘 수많은 규제가 더 비현실적이라고 한다. “대다수의 보육시설 종사자가 범법자가 된다면 법에도 문제가 있지 않나요” 물론 털어서 먼지 나지 않도록 하면 되지만 지금과 같은 운영비로 버티는 체제 아래서는 먼지가 날 수밖에 없다고 이들은 주장한다.
과도한 규제 다 지키기 버거워
양심적 원장까지 범법자로 전락
지난해부터 무상보육이 되면서 어린이집 서류 더미는 더 높아졌다. 발행하는 지침서의 두께를 보더라도 매년 규제가 얼마만큼 증가하고 있는지 실감할 수 있다. 올해의 경우 266가지 사항의 규제를 늘어놓고 있다. 정부 주머니에서 돈이 나오다 보니 법과 규정이 더욱 엄격해 질 수밖에 없다.
양산지역 많은 어린이집들이 과도한 규제와 초법적인 규제를 다 지키기가 버겁다고 하소연한다. ‘국민세금으로 운영하려면 당연히 법을 지켜야지!’하고 호통치는 사람도 있겠지만, 이들은 충분한 현장조사 없이 탁상에서 만들어진 수많은 규제 때문에 양심적인 원장들까지 ‘범법자’로 전락하는 게 지금의 현실이라고 주장한다.
한 민간어린이집 원장은 “모든 시설투자를 개인이 했는데 국공립시설처럼 회계처리를 하라고 하면 결국 초기 투자비용은 개인이 다 떠안아야 해요. 양산지역 상당수 어린이집이 작게는 1~2억에서 많게는 3~5억원씩 빚을 내 어린이집을 설립했는데 이자도 갚지 못하는 지경이 되니 무상보육 1년 만에 문을 닫아야 하는 상황입니다”고 말했다.
법률적 비영리기관으로 규정
실제 개인사비 투자한 자영업자
어린이집은 부모의 돌봄과 공공교육을 합친 보육서비스를 제공하는 곳이다. 때문에 법률적으로 비영리기관이다. 하지만 민간어린이집 대다수가 개인 사비로 시설투자를 한 일종의 자영업자다. 때문에 자영업자로서의 실익과 비영리기관으로서의 규정이 충돌하는 형국이다.
양산시어린이집연합회 관계자는 “유통기한 지난 급식재료 구입이나 리베이트 같은 것들은 자영업자로서도 당연히 비양심이지만 그 외 많은 부분에 있어 수익을 차단시키는 것은 불합리해요. 제철과일을 싸게 구입할 수 있어도 정해진 간식비를 기간 내에 모두 소진해 회계서류를 올려야 하니 일부러 비싼 물품을 사는 경우도 비일비재합니다. 또 교구구입비나 시설개선비, 특별활동비 등도 필요한데 보육료 외 학부모들에게 받을 수 수익자부담금도 월 8만원을 넘지 못하도록 해 최소한의 운영도 안되고 있어요”라고 말했다.
보육교사 1인당 최대 23명 담당
“교사의 자질 운운하지 마라”
원장들보다 더 한숨짓는 사람이 있다. 바로 보육교사들이다. 아동학대 사건이 터질 때마다 꼬리표처럼 따라 붙은 것이 ‘교사의 자질’ 문제다.
만 4~5세의 경우 교사 1인당 20명인데, 총 정원을 넘지 않는 범위에서 3명까지 더 받을 수 있어, 보육교사 한 명이 많게는 23명까지 돌본다. 이런 현실에서 보육서비스의 질이나 교사의 자질 등을 운운하는 것은 사치라고 입을 모은다.
만 3세반을 담당하고 있는 민간어린이집 보육교사는 “가령 부모가 아이를 돌본다고 했을 때 이제 막 아장아장 걷고 숟가락질도 제대로 못하는 아이 15명을 하루종일 웃으면서 돌볼 수 있을까요. 상식적인 수준에서 접근하면 보육교사들의 어려움을 이해할 수 있을 거예요”라고 설명했다.
더 큰 문제는 노동강도에 비해 처우가 형편없다는 것이다. 과거에 비해 수당은 상당히 많아졌다. 양산시에서 주는 교사처우비, 장기근속수당, 평가인증수당, 하계휴가비를 포함해 누리교육연구수당, 농어촌지원수당, 근무환경개선수당 등도 생겼다. 하지만 이 많은 수당을 다 합쳐도 평균 140만원 수준이다. 이것도 5년 이상 경력자에 해당한다. 초기 임금은 최저임금인 98만원 수준이다.
한 가정어린이집 보육교사는 “교사들의 처우가 이렇다보니 경력이 짧고 이직이 높을 수밖에 없어요. 더욱이 ‘아무나 쉽게 할 수 있는 직업’이라는 인식 때문에 온라인강좌를 통해 자격증을 따 기본적인 보육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 무더기로 보육현장에 나와 사건ㆍ사고를 일으키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국ㆍ공립 어린이집 확대 절실
직장ㆍ부모협동 등 다양화 필요
그렇다면 국ㆍ공립어린이집 확대만이 해결책일까. 원장이 개인 사비를 시설에 투자하지 않고, 교사들의 처우도 비교적 좋은 편이니 말이다. 하지만 실제 양산지역 361곳 어린이집 가운데 국ㆍ공립어린이집은 6곳으로 0.8%에 불과하다. 나머지 어린이집을 모두 국ㆍ공립으로 전환하려면 얼마나 많은 예산이 필요한지 계산조차 되지 않는다.
그래서 대두되고 있는 것이 ‘공공형어린이집’이다. 지자체가 지원하는 준 국ㆍ공립 형태의 어린이집으로 이름하여 ‘양산형어린이집’이라 부른다. 민간어린이집 가운데 양산시가 정한 일정한 시설기준과 보육프로그램 조건을 갖춘 어린이집을 선정해 월 840만원 가량 운영비를 지원해 준다. 현재 웅상지역에 2곳 어린이집이 양산형어린이집으로 운영되고 있다.
이 외에도 법인이나 직장, 부모협동 등 다양한 형태의 어린이집을 확대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이들 어린이집은 정부 지원금에 전적으로 의존하지 않기 때문에 이러한 문제에서 비교적 자유롭다. 양산지역은 법인 12곳, 직장 2곳, 부모협동 1곳이 있다.
하지만 나머지 94%에 해당하는 양산지역 일반 민간ㆍ가정어린이집에 대한 현실적인 대안이 필요하다. 이들은 현재 표준 교육비 수준에 미치지 못하는 보육료를 받고 있는데도 이마저도 수년째 동결해놓고, 자율 운영조차 못하게 하는 현실이 더는 버티기 어렵다고 하소연하고 있다.
양산시어린이집연합회는 “사립학교는 그 특성대로 운영하고, 공립학교는 교육의 공평성을 위해 필요한 것처럼 일반 어린이집은 자율경쟁체제에 맡기고 국공립 어린이집 확충은 별도로 진행해야 합니다”라고 강조했다.
어린이집 운영은 단순한 돈벌이 사업이 아니다. 부모같이 아이를 보살펴주는 것이 어린이집의 책무다. 하지만 불합리한 규정과 수많은 규제로 인해 하루하루 버티기 힘들다는 보육현장의 고충도 진지하게 들어야 한다.
무상보육 이후 학부모도 변했다
무상보육으로 또 하나 달라진 것이 있다. 학부모가 어린이집을 바라보는 시각이다.
한 가정어린이집 원장은 “상당수 학부모들이 내 주머니를 털어 보육료를 내지 않으니 가도 그만 안가도 그만이라는 생각을 많이 하시는 것 같아요. 한 달에 11일 이상 출석하지 않으면 영유아보육법에 따라 보육료를 학부모가 부담하도록 돼 있는데, 이런 경우 그냥 퇴소하겠다고 협박(?)하기도 해 그 달 보육료를 포기하는 상황도 생겨요”라고 말했다.
특별활동에 대한 요구도 상당하다.
학부모들은 영어, 체육, 피아노, 관악 등 외부강사를 초청해 어린이집도 유치원 수준의 특별활동을 해주길 바란다. 하지만 특별활동비로 월 6만5천원 이상 받지 못하도록 제한돼 있어 좀 더 수준높고, 다양한 특별활동을 하고 싶어도 예산의 범위에서 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 이같은 규정이 없는 유치원과는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반면 단 한 푼도 낼 수 없다는 학부모들로 곤혹을 치르기도 한다.
한 민간어린이집 원장은 “특별식이나 행사 등으로 보육료 외 비용이 필요한 경우가 있는데, 일부 학부모는 ‘국가에서 주는데 왜 내놔라고 하냐’며 상당히 불쾌해 하기도 해요. 이럴 때 내가 무슨 죄를 지은 것 같은 기분 마저 든다니까요”라고 하소연했다.
양산시어린이집연합회는 “어린이집은 감시와 규제의 대상이 아니라 정부 보육정책의 파트너예요. 대다수의 어린이집이 양심적으로 운영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으니, 학부모님들도 신뢰와 믿음으로 아이를 맡겨주시기 바랍니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