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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양산의 어제와 오늘
주민들 삶을 통째 바꾼 풍수해를 딛고

양산시민신문 기자 입력 2013/10/08 10:24 수정 2013.10.08 10:24



↑↑ 1979년 태풍 쥬디로 인해 유실된 양산천 제방을 응급복구하기 위해 주민들이 직접 나섰다.
요즈음 양산은 기상조건으로 봤을 때 일명 ‘축복 받은 도시’라 불린다. 큰비와 태풍은 물론, 여름철 장마와 겨울 폭설도 남의 일인양 느껴질 따름이다. 그 대신 적당한 강수량에 충분한 일조량과 폭염, 혹한에서도 비켜나 있으니 시민 스스로 자축해도 좋을 것 같다. 하지만 근대사를 돌아보면 주민들의 삶을 통째로 바꾼 대규모 기상 재난이 몇 차례 지나간 것을 알 수 있다. 그 중 가장 큰 수해는, 한국전쟁이 끝났지만 아직 생활여건이 충분하지 못해 어려운 생활 하고 있던 1957년과 1959년 두 차례 있었다.

↑↑ 1957년 칠월칠석날 내린 집중호우로 물에 잠긴 양산읍내 시가지 모습.
1957년 8월 2일 칠월칠석날이던 이날 태풍 칼멘이 양산을 강타했다. 300mm 이상 쏟아진 폭우는 이튿날 새벽 명곡천을 범람시켜 제방이 붕괴되면서 하신기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이 사고로 60여호의 가옥은 대부분 사라지고 32명의 생명을 앗아갔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신북정, 신기, 북부제방이 연쇄적으로 붕괴되면서 읍내 시가지 전역이 침수됐다. 지금도 하신기마을 토착민들 중에는 칠월칠석날 제사를 지내는 집이 많다고 한다.

2년 뒤인 1959년 태풍은 그 유명한 ‘사라’호였다. 9월 17일 추석명절을 앞두고 남해안에 상륙해 경상남북도를 관통하면서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1904년 기상관측이 시작된 이래 가장 큰 태풍으로 평가받고 있는 사라는 순간 최대 풍속 초속 85m를 기록하면서 전국적으로 847명의 사망, 실종자와 38만명의 이재민을 발생시켰다. 이 때에도 양산지역은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 1969년 호우로 침수피해를 입은 물금 증산마을 주민들이 고지대인 철로변에 움막을 지어 대피생활을 하고 있다.
1963년 태풍 셜리와 1969년 호우로 인한 침수피해도 적지 않았다. 특히 1969년 물난리 때에는 주로 물금지역의 저지대인 증산, 남평마을이 큰 침수피해를 입었다. 경부선 철로보다 낮은 지대인 만큼 큰비가 오면 오히려 강 쪽으로 물이 빠지지 않고 역류하는 현상을 보이며 많은 피해를 발생시켰다. 원동면 원리지역도 저지대라 화제천으로 밀려드는 바닷물의 역류현상에 의해 비가 그친 뒤에도 면소재지에서는 고무보트를 타고 옮겨 다니는 진풍경을 연출하기도 했다. 낙동강을 통한 바닷물 역류현상은 1990년대 들어 부산의 하단지역에 을숙도와 연결하는 하구언 공사가 완료되면서 사라지게 된다.

1969년 호우로 인해 많은 인명을 앗아간 현장이 또 있었다. 당시 경부고속도로 공사가 한창일 때라 동면 내송천 근처에 있던 공사장 인부들 숙소가 밤새 내린 비로 떠내려간 것이다. 당시 동면 근무 직원의 증언에 따르면, 11명의 인부들이 실종돼 이틀을 수색했으나 찾지 못하다가 수위가 낮아진 뒤 양산천 수관교 부근과 가산마을 앞 양산천 지류에서 시신을 발견해 면사무소에 옮겨와 사후처리를 했다고 한다.

1979년 여름 남해안을 강타한 태풍 쥬디는 우리 양산에도 극심한 상처를 남겼다. 인명 피해는 발생하지 않았지만 많은 소하천 제방이 붕괴해 마을이 물에 잠기는 소동이 벌어졌다. 유산공단 앞 양산천 수해복구현장에는 새마을기가 걸리고 인근 주민들이 모두 나와 스스로 제방축조에 나서기도 했다.

↑↑ 1991년 태풍 글래디스로 정관면 백운공원묘지의 묘역이 산사태로 무너져 내렸다.
1991년 태풍 글래디스는 물금읍 증산마을 앞 채소단지를 몽땅 물에 잠기게 할 정도로 비를 많이 뿌리면서 산사태를 많이 발생시켰다. 당시 지금의 부산시 기장군지역이 양산군 관할로 있던 시기였는데 정관면에 소재한 백운공원묘지와 대정공원묘지 묘역이 산사태로 붕괴되면서 유골이 훼손되는 사고가 발생했다. 당시 군청 복구반 활동을 했던 인사에 따르면, 산 전역에 흩어진 유골을 수습하는 와중에 몰려온 유족들이 서로 자신의 연고 유골이라고 주장하면서 다툼을 벌이던 장면이 눈에 선하다고 회고했다.

↑↑ 2003년 태풍 매미의 강습으로 인해 교동마을은 향교 건물을 비롯한 대부분의 주택이 침수 피해를 입었다.
유서깊은 마을 교동은 양산천 제방보다 낮은 지대의 특성으로 인해 호우에 배수가 원활하지 못했다. 2002년 태풍 루사와 2003년 매미로 인해 호우가 쏟아지면서 교동은 몇 번이나 침수피해를 입어야 했다. 특히 매미 때에는 수해복구로 설치된 빗물펌프장이 관리소홀로 작동되지 않아 향교 건물을 포함해 대부분의 주택이 물에 잠기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 정동찬
양산향토사연구소장
이렇듯 많은 자연재난을 당해온 양산이지만, 최근 10년 동안은 신기할 만큼 기상재난에 비켜나 있었다. 조상이 도와준 탓일까 재난 대비가 철저히 된 결과일까. 아무튼 전국의 도시들 가운데서 비교적 자연재난을 당하지 않고 기후조건도 좋은 곳이라는 것은 시민의 자긍심을 높이는 의미에서 바람직한 사실이다. 우리 후손들도 이런 혜택을 누릴 수 있도록 자연환경을 잘 보존해 나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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