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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순아 시인 양산문인협회 부지부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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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돌이켜보면 묘할 것도 없다. 우리가 문화라는 말에서 ‘보편적인’ 혹은 ‘공유하는’ 등의 의미를 읽어내는 바에야, 이런 저런 문화를 은근한 강제로 받아들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수도 있다. 그것이 문화라는 말이 지닌 힘이므로. 하지만 과연 문화라는 말이 일상화된 만큼 우리의 삶도 문화적인가? 하는 질문에는 선뜻 답하기 어렵다. 문화라는 말은 범람하는데, 도무지 문화결핍의 느낌을 떨칠 수 없다.
문화라는 말이 남발되는 배경을 보면, 이 말이 지닌 힘에 기대어 우리 안의 욕망을 부추기고, 그런 욕망이 사회적으로 전염되도록 하는 후기자본주의 사회 혹은 소비사회가 있다. 자본주의는 인간의 욕망을 비대화시키면서 많은 사람들을 끊임없는 소비기아로 내몬다.
여기에 가장 큰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대중매체다. 특히 시청각을 동원해 대중의 오감을 자극하는 TV 프로그램은 대중들에게 최소한의 비판적 함의마저 망각하게 할 위험을 안고 있다.
얼마 전 TV 방송사에서 방영중인 코미디프로그램 중에 ‘몸짱 만들기’라는 코너가 있었다. 이 코너는 단순히 웃음만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의 개념들이 변이된 채 복합적으로 전달되고 있다는 점에서 눈길을 끌었다. 특히 비대한 몸을 가졌던 두 개그우먼이 운동을 통해 체중이 감량되는 모습을 매주 확인하게 해주는 장면은, 그저 생각 없이 따라 웃기에는 아무래도 껄끄러운 데가 있다. 운동을 해 건강을 유지하는 몸보다는 날씬한 몸을 부각시켜 보여줌으로써 우리가 지향하는 여성상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얼굴과 날씬한 몸매를 가지려는 것은 모든 여성의 본능이며 그것을 나쁘다고 할 수는 없다. 문제는 대중매체 뒤에 숨은 상업주의가 문화라는 말로 포장돼 우리 호주머니를 털어낼 때, 그러면서 소비가 경제의 추동력이라고 외칠 때, 그것에 현혹되어 더러는 그러한 욕구에 맹목적으로 편승하는 덩달이들이 과도하게 많다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의 문화로 자리 잡아 집단 페르소나를 형성하고, 거기에 동조하지 못할 때 느끼는 소외감이 갈수록 심화돼 간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 문화는 분명 우리가 형성하는 문화다. 문화적 상품을 개발하기 위한 문화가 아니라, 우리 삶을 위한 문화를 만들어가야 한다. 이를 실천하기 위해 가장 우선 돼야 할 것은 문화라는 말을 올바로 판단할 수 있는 비판의식이다.
상품으로서의 문화와 주체로서의 문화는 동일한 의미가 아니다. 설사 교차영역이 있다고 하더라도 문화를 말하는 그 각각의 의도와 목표는 다르다. 문화를 상품으로 말하는 사람들은 우리를 단지 소비자로 전락시키면서 우리 생활을 식민화하고자 한다.
우리는 적어도 문화 소비처로 전락되는 몸, 그러한 삶의 면면을 ‘문화적 위기’로 볼 수 있는 눈을 가져야 한다. 그것이 가시적이고 물량적인 것에 대한 관심이나 그 실증적 사고로부터 초래되는 사회적 폐해를 개량하고 우리의 각박하고 척박한 삶을 풍요롭게 할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누군가 문화를 거론해야 한다면,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우리’ 자신으로부터 말해져야 한다. 왜냐하면 문화가 곧 우리의 삶이기 때문, 문화의 위기가 곧 삶의 위기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