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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시민신문

백년만의 귀환 - 양산 부부총 유물 ④..
문화

백년만의 귀환 - 양산 부부총 유물 ④

양산시민신문 기자 입력 2013/11/19 13:30 수정 2013.11.19 01:30



본지는 1920년 조선총독부에 의해 강제 발굴된 뒤 일본으로 반출돼 도쿄국립박물관에 보관되다 93년 만에 고향으로 되돌아온 부부총 주요 유물을 특별전 기간 동안 지면을 통해 전시합니다. 양산시민의 문화적 자긍심을 높이고, 과거 양산의 찬란했던 역사를 되짚어 보는 부부총 유물 특별전에 시민 여러분의 큰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부부총(夫婦塚) 사적 제93호, 북정동 고분군 10호분

무덤의 주인은 누구일까? 북정동 고분군 10호분을 ‘부부총’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무덤의 주인이 남녀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들을 부부일 것이라 판단하는 것은 무덤에서 있는 유물의 성격을 통해서다.

부부총에는 가는 귀걸이와 굵은 귀걸이가 출토됐다. 신라 때 대체로 가는 것은 남성이, 굵은 것은 여성이 착용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부장유물의 성격으로 볼 때 남녀임은 확실하고, 부부로 추정할 수 있다.

‘무덤의 주인’에 대해서는 다양한 이견이 있다. 유물의 성격에 비춰 당시 양산 일대에서 중앙과 연계된 정치적 세력을 갖춘 인물의 묘로 추정하면서, 당시 삽량도독인 김서현 장군 부부의 묘라고 이야기하기도 하고, 김서현의 사위가 산성의 성주로서 백제군과 대치 중 전사하여 이곳에 묻혔다는 설도 있다. 누구의 무덤인지 명확하게 판단할 수 있는 단서는 없지만 부장유물을 통해 ‘무덤 주인의 신분’은 가늠해볼 수 있다.

허리띠꾸미개는 금제, 은제, 금동제로 나뉘는데 이는 착용했던 사람의 지위를 반영한다. 금제는 왕족이상이 착용할 수 있으며, 금동제와 은제는 그 아래의 지배층이 쓴다. 부부총에서는 은제 허리띠꾸미개 2점이 출토됐는데 같은 시기 경주의 신라귀족이나 왕 무덤과 비교했을 때 상대적으로 낮은 신분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주인공은 고대 양산지방을 통솔하는 수장의 것이나 거대한 정치적 세력을 가진 지방 군주로 추정된다.

금동관(金銅冠) Gilt Bronze Crown / 높이 : 33.0㎝/ 신라(6세기)

주인이 착장하고 있던 금동관으로 금동의 얇은 판으로 제작돼 대륜부(臺輪部)와 입식부(立飾部), 수식부(垂飾部)를 따로 제작ㆍ조립했다. 입식부(立飾部)에는 정면과 측면에 출(出)자형 입식(立飾) 3개를 세웠고, 뒷면에는 S자 형태의 사슴뿔 모양 입식(立飾)을 세웠다. 입식(立飾)에는 수많은 잎 모양 금동환을 달아 화려함을 더했다.

또한 대륜부(臺輪部) 아래 길게 내려진 수하식(垂下式)은 굵은고리귀걸이와 많이 닮아 있다. 수식(垂飾)을 포함한 길이는 무려 62.6㎝나 된다.

한편, 부부총에서 출토된 금동관은 재질적인 면에서 차이가 있으나 경주 금관총에서 발굴된 금관과 형태상으로 매우 유사하다. 이는 양산지역이 신라의 중앙인 경주와 많은 교류가 있었다는 역사적 상황을 암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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