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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시민신문

백년만의 귀환 - 양산 부부총 유물 ⑦..
문화

백년만의 귀환 - 양산 부부총 유물 ⑦

양산시민신문 기자 입력 2013/12/17 09:47 수정 2013.12.17 09:47



본지는 1920년 조선총독부에 의해 강제 발굴된 뒤 일본으로 반출돼 도쿄국립박물관에 보관되다 93년 만에 고향으로 되돌아온 부부총 주요 유물을 특별전 기간 동안 지면을 통해 전시합니다. 양산시민의 문화적 자긍심을 높이고, 과거 양산의 찬란했던 역사를 되짚어 보는 부부총 유물 특별전에 시민 여러분의 큰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양산지역 최초로 고분을 발굴하다’

발굴고분의 선정

‘임나일본부’설의 증거를 찾기 위한 조사를 진행했으나 활발히 진행되지는 못하고 있었다. 1920년 양산지역 고적조사의 주목적이 고분발굴이었음은 보고서에도 명기된 사실이었다. 그 중에서도 양산시 북정동 산에 위치한 이 고분을 신라의 무덤으로 유물이 풍부할 것으로 추정해 처음 유물 수집을 목적으로 발굴을 시작했다.

그러나 양산지역의 고분 중 왜 북정동 고분군을 선택했는지 정확한 정황은 알 수 없다. 다만 북정동 구릉 위에 큰 고분이 일렬로 늘어서서 축조돼 있는 것을 멀리 바라보면 당당한 장관을 나타나고 있었다고 한다.

그 중 발굴한 고분은 우마즈카와 오가와의 협의 하에 선정했다. 이 고분의 동쪽 끝에 있는 것을 북정동 1호분이라 하고, 순차적으로 세어 마지막 서쪽 끝을 북정리 18호분이라 명명했다. 구릉 맨 아래쪽의 18호분이 통일신라의 석실묘인 점으로 볼 때 상대적으로 맨 위에 위치한 1호분의 축조연대가 가장 이를 것으로 추정했고, 그 중간쯤에 위치하는 것은 축조연대가 중간쯤일 것이라고 생각해서 ‘북정동 10호분’을 조사대상으로 선정했다.


부부총의 구조

부부총은 봉토(지상 위로 흙을 쌓아올린 부분)의 크기가 지름 23m, 높이3m인 원형의 봉토분이다. 봉토 둘레에는 비나 바람으로부터 무덤을 보호하는 호석(護石)과 주구(周構)를 만들었다. 부부총의 중심이 되는 돌방(石室)은 동서방향을 장축으로 해 길이와 너비, 높이가 각각 5.49m×2.7m×2.58m인 긴 직사각형의 형태를 가지고 있다.

무덤의 출입구(墓道)는 서쪽 방향으로 뚫었고, 나머지 동ㆍ남ㆍ북벽은 깬돌을 정교하게 쌓아올렸다. 서쪽의 입구에는 양옆에 돌을 쌓고 중앙 부분을 입구로 사용했는데, 발굴 당시에 입구는 돌로 막혀있었다.

시신이 놓이는 부분에는 높이 80㎝ 정도의 주검받침(屍床臺)를 만들었는데, 자세히 양상을 살펴보면 관대는 2차에 걸쳐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 처음에는 주인의 시신이 놓일 부분은 80㎝로 쌓고 반대편은 30㎝ 정도 낮게 조성했다. 그러나 후에 부인이 죽고 부인을 추가로 매장하는 과정에서 낮게 조성한 받침 부분을 주인이 놓인 부분과 동일한 높이까지 높여 나란하게 안치할 수 있게 조정했다.

즉, 부부총은 주인이 먼저 죽고 매장된 뒤 부인이 죽은 후 추가장으로 부인을 매장했음을 알 수 있다. 주검받침의 밑에 안치된 3구의 시신에 대해서는 일제강점기 당시 자세한 조사가 이루어지지 못한 관계로 정확한 매장 경위를 파악하기 힘들다. 많은 학자들의 추정대로 순장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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