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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시민신문

[시 한줄의 노트] 망각으로 설계한 도시..
사회

[시 한줄의 노트] 망각으로 설계한 도시

양산시민신문 기자 입력 2014/03/25 10:32 수정 2014.03.25 10:32




 
↑↑ 김순아
시인
한국문인협회 양산지부
 
고향을 잃은 나는 고향을 인터넷으로 방문한다 네이버 길 찾기 이정표로 존재하는 경기도 송탄시 서정리…가 독한 알코올냄새로 접속된다


미군병사 등에 업힌 여자들에게서 풍기던 알코올 냄새가 환하게 퍼지면서 아카시아꽃을 피운다 하나를 잊으면서 하나를 얻는 망각증세, 40년 만에 고향을 찾은 그날, 고향은 신도시로 설계되어 어디론가 은닉되고 없었다 고향을 미궁에 빠뜨린 그날 이후 나는 몽환의 거리를 헤맨다


신도시 설계도면은,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잃어야 하는 제로게임이 우주의 질서인 것을 외면한 마이너스 전략, 생명의 순환구를 틀어막은 길들이 설계되어 있다. 망각으로 설계된 도시 어딘가 폭설로 쏟아지는 아카시아 향기, 술 취한 여자 몸에서 나는 알코올 냄새가 서정리를 검색한다


도시 설계자는 교묘하게 나를 도면의 일부로 넣었다


고향을 인질로 삼은 것이다


정진경 시인
1962년 부산 출생. 부경대학교 국어국문학박사. 2000년 《부산일보》신춘문예로 등단. ‘부산작가회의’ 회원,《시와사상》 편집동인. 현, 부경대 강사. 시집으로,『알타미라벽화』(한국문연, 2003), 『잔혹한연애사』(현대시세계, 2009),『여우비 간다』(푸른사상, 2013)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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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는 근대적 삶과 문명의 황폐화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보여준다. 화자가 가 닿고자 하는 곳은 ‘서정리’. ‘경기도 송탄시’로 검색되는 이곳은 물론 시인이 실제로 돌아가고자 하는 곳은 아니다. 그곳은 우리 모두가 되찾고 싶어 하는 원초적 ‘고향’일 것이다.

그러나 그 고향은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잃어야 하는 제로게임이 우주의 질서인 것을 외면한’, ‘도시 설계자’의 욕망에 의해 영원히 ‘잃어’버리게 됐고, 우리는 ‘생명의 순환구’가 ‘틀어막’힌 몽환의 거리를 헤매고 있을 뿐이다. 이는 결국 문명 세계 내에 존재하는 인간의 해소할 수 없는 불만, 그럼에도 그 안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인간의 숙명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것이다.

시인이 잃어버린 고향은 단순히 고향만이 아니라 주체로서의 자기 자신이기도 할 터. 그런 점에서 이 시는 자신의 정체성을 ‘망각’하고, 세계에 대한 아무런 비판도 없이 황폐하게 살아가는 우리 내면에 일침을 가하고, 스스로의 삶을 반성하게 하는 시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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