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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진상 평산교회 목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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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난히 추운 겨울방학이었지만, 그는 한 주에 두 번씩 두 시간을 달려와 두 학생을 위해 열심히 강의했다. 그로부터 10년 뒤 이 두 학생은 노벨 물리학상을 받게 됐다. 그들은 ‘첸넝양’과 ‘충도리’라는 중국계 미국인 과학자였다. 수상 소감을 묻는 자리에서 두 사람은 이렇게 대답했다. “우리 두 사람을 위해 열정적으로 강의해 주셨던 찬드라세카르 박사님이 저희들을 이 자리에 서게 해주셨습니다”
이처럼 우리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 중 하나는 만남이다. 인생에서 누구를 만나냐에 따라 우리 일생이 결정된다 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우리는 부모, 친구, 선생님, 동료와 주변 사람 등 다양한 사람을 만난다. 그들과 어떻게 만나 어떤 일을 도모하며 어떤 길을 가느냐 하는 것이 우리 삶의 전부라고 할 수 있다.
우리 인생의 길에서 만난 사람들과 더불어 나누는 모든 행위는 결코 어떤 행위가 됐건 가르침과 배움이라는 형태로 이뤄진다. 그 관계가 부모와 자식이건, 선생과 제자건, 친구와 주변의 동료가 됐건, 수직적이건 수평적이건, 가르침이 됐건, 나눔이 됐건 결국은 교육의 모습을 지니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교육의 형태 중에서도 비교적 가장 많은 것은 선생과 제자의 관계다. 이 관계에서 우리는 많은 것을 습득하고 영향을 받는다. 삶의 배움에는 일정한 틀 없이 습득되는 것도 있으나, 가장 기본적인 틀은 역시 교육이라고 하는 테두리 안에서 형성되기 때문이다.
만약 그것이 의미 없는 일이라면 우리 인생에서 교육을 통해 이뤄지는 모든 구조는 이 지상에서 벌써 소멸됐을 것이다. 더욱이 교육이란 지식 전달만이 아니라 인격 전달과 교류도 하기 때문에 우리 삶에서 절대적인 역할을 한다. 우리 삶의 행복이란 기능에 의해 습득되는 것이 아니라 느낌과 정서적 수용에 의해서 이뤄진다. 그러므로 인격 교류가 이뤄지는 교육은 매우 중요하다.
그리스 역사 철학자 크세노폰이 소크라테스에 대해 기록한 일화가 있다. 어느 날 아테네 군관학교를 갓 졸업한 풋내기 청년 장교가 소크라테스를 찾아와 자기가 공부한 지식을 늘어놓으며 자랑했다.
“우리 선생님이 언제든지 좋은 사람은 행렬의 앞과 뒤에 세우고 나쁜 사람은 가운데 세우라고 가르쳐 주셨어요” “매우 좋은 가르침일세. 그러나 너희 선생이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을 어떻게 분간하는지를 가르쳐 주더냐?” 이 말에 당황한 청년 장교는 “그것은 안 가르쳐 주셨어요”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소크라테스는 “그러면 돌아가서 네 월사금을 도로 찾아 가지고 오너라”고 했다.
이처럼 선과 악의 구별과 그 판단의 표준을 가르쳐 주지 않는 교육은 어떤 종류의 교육을 불문하고 기본적인 인간교육에 실패한 교육이다. 스승의 날을 맞이하면서 ‘찬드라세카르’ 박사 같은 사명감이 있는 스승과 소크라테스의 말처럼 선과 악의 구별과 그 판단의 표준을 가르쳐 주는 스승이 진정한 스승임을 다시 한 번 가슴에 새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