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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송 스님 시인 통도사 극락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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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것은 없다. 이것이 영원한 가르침이다’
영원하지 않는 가변적인 존재가 어찌 무상(無相)이 될 수 있을까?
자, 그러면 무상(無相)이란 무엇인가? 살펴보자.
일찍이 고오타마 싯다르타는 위대한 승리자의 표상인 차크라바르틴(전륜성왕, 轉輪聖王)이자 여래(如來), 응공(應供), 정변지(正徧知), 명행족(明行足), 선서(善逝), 세간해(世間解), 무상사(無上師), 조어장부(調御丈夫), 천인사(天人師), 불(佛), 세존(世尊)으로 거듭나 붓다 이전의 붓다, 과거 삼세의 스승과 어깨를 나란히 견주며 인간해방을 선언했다. 그 사자후를 발하기 전 고오타마 싯다르타는 깊은 번뇌에 빠졌다.
“이 가르침은 실로 이해하기가 어렵다! 그 누가 이와 같은 가르침을 믿고 이해해 수행한단 말인가?”
그의 길고 긴 장탄식이 이 진리의 문에 들어서는 천신만고의 어려움을 극적으로 대변하고 있다.
무상은 절대평등을 예고한다. 삼라만상, 근대 한국 선종의 종장인 경봉대선사가 그 깨달음의 일성(一聲)에 ‘내가 나를 온갖 것에서 찾았다(두두물물, 頭頭物物)’고 말한 그 온갖 것, 삼라만상 하나하나 모두 성품이 티끌 하나 변치 않는 온전히 균일한 평등성을 갖고 있다는 말이다. 거기에 ‘티끌 하나 변치 않는 믿음을 낼 자가 누구인가?’하고 철인(哲人) 고오타마 싯다르타는 반문하고 있는 것이다.
나중에 밝혀진 사실이지만 지혜와 복덕을 겸비한 제자 수보리(須菩提)조차도 “세존이시여! 제가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닦아온 복과 지혜로는 알 수 없습니다”라고 고백한다.
물론 겸양의 미덕으로 치부할 수 있겠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기라성 같은 뛰어난 제자, 사라불, 목건련, 부루나미다라니자, 마하가섭 등 상수제자의 고백이 모두 일치하는 걸 보면 딱히 그렇지 않음을 반증한다 할 수 있겠다.
영축산 기사굴에 고요함과 적멸의 광휘로움에 휩싸여있는 500명의 아라한이 있었다. 그리고 황금빛 몸매, 다정한 눈빛, 범천(梵天)의 수려한 용모로 허리를 바로세우고 말없이 앉아있는 한 사람. 그는 바로 아득한 과거세에 연등 부처님으로부터 “이름을 석가모니라 하리라!”라고 수기(授記)받은 고오타마 싯다르타였다. 더 이상 세상의 그 무엇으로 형용하기 어려운, 그물을 벗어난 바람이자 현존하는 전설이 된 그는 이 모임의 스승이었다.
불가설불가설(不可說不可說).
이 거룩한 모임은 현묘해 설명이 불가능하다. 누구라도 그 자리에 서서 말없는 자애로움으로 심금을 울리는 법문에 귀 기울인다면 탄복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 가르침이 이와 같으니 듣는 자나 법을 베푸는 자가 차별이 없음은 당연한 귀결이다.
이것은 무상의 단적인 예라 할 수 있거니와 동방의 해 뜨는 나라, 솔롱고스 곧 무지개나라의 옛 선사도 ‘상 가운데 부처가 없고 부처는 상이 없다(상중무불 불중무상, 相中無佛 佛中無相)’했으니 자고로 선사의 후예들, 그 솜씨가 이러했다. 그 후 이 열정에 가득 찬 선사는 아무도 없는 바위에서 좌선하다 열반에 들었다. 몇 날 며칠이 지나 겨우 발견됐는데 이는 신선의 경지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온 몸으로 무상의 실체를 보여준 선사의 이름은 법안화상이다.
드러내지 않고 드러낼 것이다. 말하지 않고 말 할 것이다. 이는 선가의 보배로운 지침인데 옛 부처도 그러했다. 헛된 명리, 탐욕, 기만 따위는 무상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 그것은 바람을 베는 것과 같다. 현자에게는 모욕도 칭찬도 다 부질없는 유희일 뿐이다.
“모든 것은 영원한 것이 아니다.(제행무상, 諸行無常) 나고 없어지는 것조차 없으면(생멸멸이, 生滅滅已) 그때 고요하고 즐거우리라!(적멸위락, 寂滅爲樂)”
이 사자후를 잉태한 실체는 바로 무상이다. 영원한 것이 없다는 것을 온 몸으로, 온 정신으로 사무쳐 체득해야 무상에 이를 수 있다. 곧 존재의 실체 없음을 알아야 무아(無我)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