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가 있을 때마다
정당이 보여주는 행태는
국민이 식상할 만 하다
지역민심이 우선되는
상향식 공천 자리잡아야
정치불신 해소 가능하다
![]() | ![]() | |
↑↑ 박성진 본지 논설위원 | ||
ⓒ |
우리 정당정치는 여야의 간판 정당이 자신의 정치이념을 확고한 정강ㆍ정책으로 가져가지 못하고 인물 위주의 도당으로 운영하는 바람에 국민 감동을 이끌어내지 못하고 있다. 사실 새누리당이든 새정치민주연합이든 이념의 중간 바로미터에서 약간씩 좌우로 비켜나 있다는 것이지 진정 보수와 진보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하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면서도 서로 ‘보수OO’이니, ‘OO진보’니 서로를 공격하고 있다. 이런 정당이 살아남는 과정에서 가장 번듯한 재목은 선거다. 후보 공천이라는 ‘전가(傳家)의 보도(寶刀)’가 있기 때문이다.
미국 등 민주주의 역사가 오래된 나라에서는 대부분 정당이 중앙당의 모양을 갖추고 있지 않다. 대외적인 역할을 맡는 원내 대표가 있긴 하지만 문자 그대로 대외적인 필요에 의해서 생긴 자리다. 상향식 민주주의가 정착돼 있기 때문이다. 총선이든 대선이든 국민, 또는 당원의 선택이 필수적이기 때문에 중앙당 눈치를 봐야 하는 우리와는 전혀 다른 과정을 거쳐 후보가 되고 선거를 치른다. 그래서 그 과정은 항상 당원의 축제가 되곤 한다.
우리는 어떤가. 적지 않은 지역에서 특정 정당 공천은 당선과 직결된다. 자연히 경쟁이 심할 수밖에 없다. 공천장이 당선증이다 보니 편법을 써서라도 차지하고자 애를 쓰게 된다. 부정한 방법이 동원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중앙당에서는 당선 확률이 높은 지역에 대한 공천권을 효과적으로 발휘하기 위해 편법을 사용하기도 한다.
또는 전략적으로 당선이 어려운 지역에서도 비슷한 방법이 이뤄지고 있다. 각 당이 이번 국회의원 재ㆍ보궐선거에 즈음해 구사하고 있는 전략이 국민으로부터 지탄받고 있는 현실은 이제 더 이상 유권자가 무지몽매하지 않기 때문이다.
유력 정치인 모셔오기, 상대 당 후보 맞춤 카드 활용, 신청지와 다른 곳에 배치하는 일명 돌려막기, 자당에 유리한 이슈를 제공했던 인물 전략 공천 등 정작 선거를 하는 지역구 민심이나 여론은 무시한 채 당 지도부 논리에 의해 후보가 결정되는 과정은 국민으로부터 비난받기에 충분했다.
후보 결정 명분도 제각각, 임기응변식이었다. 어떤 곳에서는 지역 일꾼론이 또 다른 지역에서는 큰 인물론이 제시되곤 했다. 이미 흘러간 정권 실력자가 다시 등장하면서 우리 정치판은 퇴보와 정체를 거듭하고 있다. 이러니 어떻게 국민 지지를 받을 수 있겠는가.
상향식 공천의 가장 큰 장점은 지역 유권자가 직접 후보를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대부분 정치 선진국에서 채택되고 있는 방식이 유독 우리에게는 100% 받아들여지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여야는 이 부분에서 사실상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 국민참여경선에서 상대 당 지지자가 훼방할 수 있다는 논리다. 그래서 같은 날에 경선을 실시하는 규정을 정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렇다, 그렇게 하면 되지 않는가. 하지만 속마음은 다르다. 중앙당 입김이 배제되는 경선을 치르기에는 아직도 우리 정당구조가 견고하지 못한 것이다. 공천에 불만을 품고 탈당해 출마했다가 당선 되면 다시 복당이 허용되는 구조 속에서 과연 정당의 존립가치가 지켜지고 있다고 볼 수 있겠는가.
여당인 새누리당 대표 경선도 점입가경이다. 후보 간 공격이 선을 넘었다. 정치의 기본인 국민 살림살이를 걱정하는 후보는 눈을 씻고 봐도 없다. 서로 헐뜯기만 할 뿐이다. 대한민국이라는 배를 이끌고 있는 거대 여당의 모습이 이럴진대 무엇을 더 기대할 것인가.
월드컵 대표팀 추락을 보면서 우리가 느끼는 것은 정작 비난 상대를 찾았을 때는 잔인하리만치 끝을 본다는 것이다. 인간적 배려와 사회적 관용과 이해는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 문제다. 정치는 안으로는 싸우고 겉으로는 웃는 것이라 하지 않았던가.
나동연 시장 재선 취임식에 낙선한 새정치민주연합 김일권 후보가 참석해 축하 메시지를 보냈다는 소식은 지리한 장마에 한 줄기 햇살처럼 신선한 느낌을 주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