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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봉 스님 불교세계] 경봉대선사 ‘달마’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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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봉 스님 불교세계] 경봉대선사 ‘달마’⑧

양산시민신문 기자 입력 2014/09/16 10:11 수정 2014.09.16 10:09




 
↑↑ 일송스님
시인
통도사 극락암
 
백호 임제 선생(1549∼1587)은 조선 중기인 명종~선조 때 문인이며 시인이다. 본관은 나주(羅州), 자는 자순(子順)이다. 호는 백호(白湖), 풍강(楓江), 소치(嘯癡), 벽산(碧山), 겸재(謙齋)로 아버지는 병마절도사를 지낸 진(晉)이며, 어머니는 남원 윤씨다.

임제는 어려서부터 지나치게 자유분방해 스승이 없었다. 20세가 넘어서야 대곡(大谷) 성운(成運)에게서 학문을 배웠다. 1570년(선조 3년) 22세 되던 겨울날 서울로 가는 길에 쓴 시가 성운에게 전해진 것이 계기가 돼 성운을 스승으로 모셨다고 한다.

젊어서는 얽매임을 싫어해 기녀와 술자리를 즐기며 살았다. 1571년(선조 4년) 23세에 어머니를 여의었고 이때 잠깐 술을 끊고 글공부에 뜻을 뒀다. 과거에 몇 번 응시했으나 번번이 떨어졌다. 그로부터 계속 학업에 정진했으며 ‘중용’을 800번이나 읽은 일은 유명한 일화다.

1576년(선조 9년) 28세에 속리산에서 성운을 하직하고 생원 진사에 합격했다. 이듬해 알성시에 급제한 뒤 흥양 현감, 서도 병마사, 북도 병마사, 예조 정랑을 거쳐 홍문관 지제교를 지냈다. 그러나 성격이 호방하고 얽매임을 싫어해 벼슬길에 대한 마음이 차차 없어졌으며 관리가 서로를 비방, 질시하며 편을 가르는 현실에 깊은 환멸을 느꼈다고 한다.

그는 관직에 뜻을 잃은 이후 이리저리 유람하다 고향인 나주 회진리에서 1587년(선조 20년) 39세로 세상을 떠났다. 죽기 전 여러 아들에게 “천하의 여러 나라가 제왕을 일컫지 않은 나라가 없는데, 오직 우리나라만은 끝내 제왕을 일컫지 못했다.

이처럼 못난 나라에 태어나서 죽는 것이 무엇이 아깝겠느냐! 너희는 조금도 슬퍼할 것이 없느니라”라고 한 뒤 “내가 죽거든 곡을 하지 마라”고 유언을 남겼다. 이 글이 유명한 ‘물곡사(勿哭辭)’다.

평생 검(劍)과 옥피리를 좋아했고 술 마시고 방랑하며 여인과 친구를 사귄 짧은 삶이었다. 저서로는 ‘수성지(愁城誌)’, ‘화사(花史)’, ‘원생몽유록(元生夢遊錄)’ 등 3편의 한문소설이 있으며, 문집으로는 ‘임백호집(林白湖集)’ 4권이 있다.

일설에 의하면 백호 임제 선생은 28세에 속리산에서 스승이신 성운 선생을 하직하고 하산하면서 다음의 시를 지었다고 한다.

도는 사람을 멀리 아니하나,
사람은 도를 멀리 하누나!
(道不遠人 人道遠, 도불원인 인도원)
산은 속세를 떠나지 않으나,
속세는 산을 떠나 가누나!
(山非離俗 俗離山, 산비리속 속리산)


다음의 시는 대둔사에 있는 북미륵암을 두고 읊은 시이다.

북미륵(北彌勒)

연하(煙霞)가 속세를 가로막아
(煙霞隔下界, 연하격하계)
난야(蘭若)의 선경이 감춰졌네.     
(蘭若秘仙境, 난야비선경)
빼어난 골짜기 서해를 삼키고         
(絶壑呑西海, 절학탄서해)
아슬한 봉우리 북두성에 걸려있네.    
(危巒掛北辰, 위만괘북신)
외로운 마음 어찌 잠이 오리!     
(孤心那得睡, 고심나득수)
텅 빈방 저절로 속진 사라지니    
(虛室自無塵, 허실자무진)
신령한 소리 들리는 고요한 밤    
(夜靜聞靈籟, 야정문영뇌)
등불 꽃 자주 흩어지네.          
(登花落又頻, 등화낙우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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