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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시민신문

[詩 한 줄의 노트] 큰 스승..
사회

[詩 한 줄의 노트] 큰 스승

양산시민신문 기자 입력 2015/01/20 10:39 수정 2015.01.20 10:38
김순아 시인



 
↑↑ 김순아
시인
한국문인협회 양산지부
 
자식한테 편지가 와도
세금고지서 청첩장이 날라 와도 내게 가져왔다
가는귀를 먹었기에 큰 소리로 또박또박 읽어주었다
글자를 모르는 대신
농사만큼은 반듯하게 지으신 어른
우수, 경칩, 소만, 망종, 처서, 백로, 소설, 대설,
24절기 속에 몸을 넣고
해와 달과 바람과 비를 벗하며 평생을 살았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글자였다
징용 통지서 한 장에 일본으로 끌려가 죽을 고생을 하고
전쟁 통엔 내용도 모르는 종이쪽지 한 장에 갖은 매를 다 맞았다
사상도 이념도 모두 글자싸움으로 여긴
그에게 글자는 칼보다 총구보다 더 두려웠다
 
글자를 몰라도 자식을 낳았고
글자를 아는 사람보다 착하게 키웠다
곡식들은 글자를 모르는 그를 차별하지 않았다
 
죽음을 통보한 것도 글자였다
병원의 진단서 한 장으로 그는 죽음을 준비했다
꽃상여를 멜 이웃에게 기어이 품삯을 미리 주고
손수 입관에 쓸 황토를 곱게 쳐서 포장을 덮어놓았다
글자를 아는 자식들에게 유언장 대신 한 말은
음식 아끼지 말고 넉넉히 준비해라
이 한마디 뿐

임종 며칠 전 병실을 찾았을 때
못자리 잘 됐느냐고 물으며 희미하게 웃던 어른
화창한 봄날 내가 멘 꽃상여를 탔다
봉분을 하고 착한 자식들은 한자로 새긴 비석을 세웠다
나는 비문 대신 자식들이 보냈던 편지글을 되살려 속으로 읽어주었다

그때 숲에서 뻐꾸기가 몇 번 울었다.


정낙추 시인
1950년 충남 태안에서 태어났다. 1989년부터 지방문학 동인지 ‘흙빛문학’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2002년 ‘내일을 여는 작가’로 등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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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는 “글자를 몰라도 자식을 낳았고/ 글자를 아는 사람보다 착하게 키웠”던 우리 아버지를 ‘큰 스승’으로 형상화해 소위 배운 자에 대해 날카로운 비판의식을 보여줍니다.

“징용 통지서 한 장에 일본으로 끌려가 죽을 고생을 하고/ 전쟁 통엔 내용도 모르는 종이쪽지 한 장에 갖은 매를 다 맞았”던 아버지에게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글자”였을 겁니다. 배운 자야말로 “칼보다 총구보다 더 두려운” 존재였을 겁니다.

이념을 앞세워 농민을 기만하며 집권의 볼모로 이용해 온 우리 정치 현실과, 이러한 현실에 대한 시인의 뿌리 깊은 불신이 반영된 시. 찬찬히 읽다 보니 가슴이 먹먹해집니다. “음식 아끼지 말고 넉넉히 준비해라”. 가슴골 어딘가에서 뻐꾸기 울음소리가 끝없이 들려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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