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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병준 범어고등학교 교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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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어떤 교사는 철학자 칸트보다도 더 수업시간을 철저하게 지켜 아이들이 불만을 말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특히 그 교사가 점심시간 전인 4교시에 수업이 있는 날이면 그 불만은 더욱 컸다. 수업을 조금만 일찍 마치면 급식소에 빨리 가서 밥을 먹을 수 있을 것 같은데 그 선생님만은 융통성 없이 수업 시간을 다 지켜 매번 늦게 된단다.
교사 중에는 위의 경우처럼 원칙을 철저하게 지켜 융통성이 없다고 불평을 듣는 일이 있다. 그런 때에 정해진 어떤 원칙이나 기준을 지켜야 한다고 강조를 하면 아이들은 ‘다른 아이들은, 다른 반은, 다른 선생님은 지키지 않는데 왜 우리만 지켜야 하냐’고 말한다. 원칙을 지킨다는 것이 오히려 불평을 듣는 일이 돼버리는 것은 모두가 지켜야 할 원칙을 모두가 제대로 지키지 않기 때문에 손해를 입을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인 것 같다.
교사는 학생에게 ‘융통성이 없다’고 하는 말을 듣더라도 원칙을 지키기 위해 노력한다. 그렇게 하는 것이 공정성을 담보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원칙을 지키는 일이 쉽지 않은 경우가 종종 생긴다. 사람에 따라 원칙을 해석하고 적용하는 차이 때문에 문제가 생기는 경우와 원칙 그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경우도 있고, 원칙 자체를 아예 무시하는 경우에 그렇다.
쉽게 예를 들면, 학교에서 실내화만을 신는 것을 원칙으로 삼는 경우다. 어떤 교사는 사정을 봐 주지 않고 어떤 경우라도 실내화를 신지 않으면 지적하거나 벌을 준다. 그러나 어떤 교사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필요한 경우에는 실내화를 신지 않고 운동화를 신어도 된다고 생각한다. 어떤 학생들은 여기에 도대체 원칙이 있냐며 무시한다.
정해진 규칙을 잘 지키도록 하는 것이 교육이라고 한다면 교육에 있어서 융통성이란 무엇일까를 생각하게 하는 일이다. 대다수 아이들은 규칙을 잘 지켜서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는 규칙이 많다. 여기에 문제를 제기하면서 잘못된 것을 고치자고 제안하는 일이란 쉽지 않다.
모두가 그 규칙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은 하면서도 그것을 고치자는데 실제적인 어떤 행동을 함께하자고 하면 자신에게 혹시라도 있을 불이익을 생각해서 행동하지 않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공익을 우선한다고 하지만 사익이 앞서는 것이다. 이런 일이 쌓이면 이제는 모두의 행동은 원칙과 상관없이 자신의 처지나 상황에 맞는 융통성을 발휘하게 되는 것 같다. 학교에서 아이들이 가끔 보이는 이러한 행태는 아마도 사회로부터 배우는 것 같다.
관행으로 여기는 잘못된 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행동하는 것에서 교육이 들어설 자리가 없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당위로 받아들여 교양과 상식이 돼야 할 일이 무참히 무너져 교육이 성립되기 어려운 현실로 자꾸만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사회가 학교의 연장선에 있는 것이라면 원칙을 무시한 융통성을 발휘해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는 것이 공익을 해치는 일임을 알 수 있도록 아이들에게 알려줄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럴 때 교육이 바로 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