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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성진 본지 논설위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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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교육 부실에 기인한다
이기와 독선에 가득찬 아이들
그 책임은 어른에게 있다
가정교육과 지도층의 솔선이
사회 든든한 틀 만든다
가족 단위 손님이 주로 찾는 음식점 풍경 하나, 어른이 음식을 먹으며 단란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 주변으로 어린아이들이 장난을 치며 돌아다닌다. 그러다가 옆 테이블 손님 식사를 방해하기도 하고 테이블 사이를 깡총 거리다가 부딪혀 울음을 터뜨리기도 한다. 그래도 크게 나무라거나 제지하는 부모는 없다. 간혹 아이를 옆에 앉혀서 음식을 입에 넣어주는 엄마도 눈에 띈다. 제 손으로 충분히 숟가락질할 정도 나이인데도 먹지 않으려고 보채는 아이에게 억지로 먹이려다 보니 그렇다.
또 다른 풍경 하나, 조금 규모가 큰 음식점이면 필수적으로 갖추게 된 어린이 놀이방이 있다. 어른은 어른끼리 식사와 담소를 즐길 수 있고 아이들은 신나게 뛰어놀 수 있으니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이다. 이런 시설을 갖춘 음식점이 늘어난다는 것은 그만큼 고객에게 환영을 받는다는 뜻일게다. 하지만 과연 바람직한 현상일까.
우리나라에 있는 외국 대사관에서 근무하고 있는 북유럽의 한 외교관은 매주 한 번 이상 가족과 외식을 하는데 어린아이들과 1시간 이상 식탁에서 식사와 대화를 나눈다고 했다. 어린아이들에게 식사예절에 관해 교육과 실습을 함께 한다는 말이다. 최소한 1시간 이상을 식탁 앞에 앉아 있도록 훈련하는 것은 타인에 대한 배려를 몸에 배도록 만든다고 한다. 프랑스의 정찬(正餐)은 간혹 2~3시간이 걸릴 때도 있다.
세계에서도 저출산 국가 선두를 달리고 있는 우리나라다. 아이들을 많이 낳지 않다 보니 대부분 가정에서 자녀는 한두 명에 불과하다. 베이비붐 세대에 집집마다 대여섯명의 아이들이 천덕꾸러기 대접을 받으며 부모 손보다는 저희 형제들끼리 보살핌을 주고받으며 성장할 때와는 천양지차다. 아동 학대에 대한 우려가 사라지지 않고 있지만, 많은 경우에 ‘칙사 대접’을 받고 있음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한때 재벌자녀의 ‘갑질’ 논란을 일으켰던 대한항공 조현아 부사장 일탈 행위에 대해 아버지인 조양호 회장이 직접 나서 부모교육이 잘못됐음을 사과하는 일이 있었다. 딸자식에 대한 선처를 호소하는 부정(父情)에는 동정이 갔지만, 다 큰 자녀의 사회적 행동에 대해 부모가 나서 잘못을 비는 모습은 우리나라에서나 가능한 국민 정서인 것 같다.
이 대목에서 우리 자녀교육의 현주소를 살펴보는 것은 필요한 일이다. 저출산과 높은 이혼율, 맞벌이 부부의 폭발적인 증가 추세가 자녀교육에 악영향을 끼치고 있음은 분명하다. 빈곤과 일자리 부족, 생존을 위한 경제활동에 매달려야 하는 여건 역시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이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그 아이들이 서서히 부모가 돼가고 있다는 것이다.
재산이 많아도 제대로 쓸 줄 모르는 졸부를 존경하지 않듯 석유로 돈 번 산유국을 문명국이나 선진국이라 칭하지 않는다. 두바이에 7성급 호텔이 서고 대학까지 무상으로 보내준다고 해도 무덤덤한 중동의 나라들은 흡사 1970년대 서울 강남의 부동산으로 떼돈을 번 졸부처럼 빈자의 부러움을 살 수는 있을지언정 존경심을 자아내지는 못한다.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 소득의 사회 환원 등 박애나 도덕적 책무를 충실히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런 현상은 그 사회 교육 본질에 좌우된다.
유소년기에 배양해야 할 인간의 덕목은 자립심, 윗사람에 대한 공경, 우정과 의리, 타인에 대한 배려심 같은 것이다. 이러한 심성은 단순한 주입식 교육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교육주체의 모범적인 현신과 지속적인 가르침에 의해서 완성되는 것이다. 고대사회와는 달리 현대사회를 형성하는 것은 민중 다수다. 출중한 개인보다는 보편적인 다수의 인간성으로 지켜나가야 하는 것이다.
민족 큰 명절 설이 며칠 남지 않았다. 우리 아이들 복주머니에 세뱃돈을 가득 넣어주는 것 못지않게 제대로 된 사회성을 키워 나갈 수 있도록 가르침이 필요하다. 외골수의 이기심을 배척하고 인류애적인 이타심을 고양하는 것만이 따뜻한 문명사회를 지탱하는 길임을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교육의 기본은 가정이다. 아이들을 자기만 아는 독불장군으로 키우는 것은 삶의 독배를 건네주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사회의 든든한 틀은 서로가 떠받치는 가운데 만들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