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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진상 평산교회 담임목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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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조선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도 나라를 집어삼키기에 부족했는지 1910년, 강제적으로 우리나라와 일본을 합방시켰다. 군대와 일본인 헌병, 그들을 돕는 헌병 보조원은 전국에 배치돼 국민을 감시했다.
또 갖은 방법을 동원해 우리 문화를 없애고, 식민사관을 심기 위해 일본식 성명 강요, 신사참배 등으로 교육ㆍ종교계를 장악했다. 애국지사와 민족 지도자를 싹쓸이하듯 감옥에 가뒀으며 백성 재산과 살림도 강제로 빼앗았다.
젊은 여자를 비롯해 어린 소녀들까지도 성적 노리갯감으로 사용하기 위해 위안부를 만들었으며 남자들은 징용으로 끌고 가 전쟁의 총알받이로 내몰았다.
그런가 하면 그들은 온 세계를 향해 “조선 백성은 미개하고 열등한 민족이라 일본인이 도와주지 않으면 안 된다”고 선전했다.
3.1운동 결과는 처참했다. 당시 일본군의 무차별 총격 때문에 국민 7천509명이 살해되고 1만5천961명이 부상당했으며 4만6천948명의 무고한 양민이 체포돼 감옥에서 고난을 겪어야 했다.
3.1운동 당시 상해에서 간행된 영어신문 ‘대륙보’ 기자였던 파이버 씨는 “일본 헌병이나 군대는 아무리 총칼로 무찌르고 쏘아도 조선인은 돌 하나 던지지 않았다. 왜경과 왜병은 피에 굶주린 호랑이 떼와 같이 붉은 피를 뒤집어쓰고 뛰어다니며 칼로 베고 창으로 찌르며 수많은 조선인을 죽였다. 그러나 군중은 한층 더 맹렬하게 만세를 불렀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이 운동은 민족 자주 의식과 독립 의식을 세계만방에 드러낸 운동이었으며, 철저한 비폭력, 무저항 운동이었다. 또 이 운동은 ‘잃어버린 나라를 찾는 운동’이며, ‘잃어버린 자아를 찾는 운동’이었다.
행정자치부 국가기록원이 공개한 ‘기생단 판결문’에 따르면 당시 경상남도 통영군 기생조합소 기생이던 정아무개(당시 21세)와 이아무개(20세) 씨가 장날에 만세운동을 벌이기로 하고 동료 기생 5명을 모아 기생단을 조직했다. 정 씨는 자신의 금반지를 저당 잡혀 시위 물품을 산 뒤 1919년 4월 2일 3천여명의 군중을 이끌고 만세운동을 주도했다.
판결문에는 “기생단 7명이 열광적인 기세로 군중의 최선두에 서서 만세를 외치고 남자는 모자를, 여자는 치마를 흔들면서 동시에 만세를 절규하며 소요를 일으킴이 극히 심했다”고 적혀 있다.
요즘처럼 자기 자신을 위해, 자기 가정을 위해서는 희생하는 사람은 있다. 하지만 나라를 위해, 지역을 위해 희생하는 사람은 얼마나 있을까를 반성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