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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순아 시인 한국문인협회 양산지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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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거나 되돌아갈 수 없을 때
한 꽃 품어 꽃핀다
내내 꽃피는 꽃차례의 작은 꽃은 빠르고
딱 한번 꽃피는 높고 큰 꽃은 느리다
헌 꽃을 댕강 떨궈 흔적 지우는 꽃은 앞이고
헌 꽃을 새 꽃인 양 매달고 있는 꽃은 뒤다
나보다 빨리 피는 꽃은 옛날이고
나보다 늦게 피는 꽃은 내일이다
배를 땅에 묻고 아래서 위로
움푹한 배처럼 안에서 밖으로
한소끔의 밥꽃을
백기처럼 들었다올렸다 내리는 일이란
단지 가깝거나 무겁고
다만 짧거나 어둡다
담대한 꽃냄새
방금 꽃핀 저 꽃 아직 뜨겁다
피는 꽃이다!
이제 피었으니
가던 길 마저 갈 수 있겠다
정끝별 시인
1988년 ‘문학사상’ 신인발굴에 시가, 199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평론이 당선돼 시 창작과 비평을 병행하고 있다. 시집 ‘자작나무 내 인생’, ‘흰 책’, ‘삼천갑자 복사빛’, ‘와락’을 비롯해 다수의 시론평론집과 해설집을 발간했다. 유심작품상, 소월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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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이 눈에 들어온다는 것은 문득 자신의 모습이 보인다는 것입니다. ‘잊거나 되돌아갈 수 없을 때’ 쓸쓸하게 번져오는 존재감 같은 것. 봄볕에 일제히 피는 듯싶지만 제각각 나름의 사연과 나름의 시간을 가지고 자신을 버텨왔을 ‘꽃’들. 그것은 단지 ‘방금 꽃핀 저 꽃’이 아니라, 그 꽃에 투영된 시인의 과거이자 미래이기도 하겠지요.
꽃을 피우고 홀씨를 날리며 끊임없이 번식해가는 저 치열한 생(生)에서 봄날은, 잠시 떠올려보는 ‘미련(未練)’ 같은 것인지도 모릅니다. 잊지 않았다는, 잊지 않겠다는 다짐 같은 것인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