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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시민신문

옛 분청사기, 내손으로 빚는 게 꿈..
문화

옛 분청사기, 내손으로 빚는 게 꿈

양산시민신문 기자 입력 2015/03/24 09:48 수정 2015.03.24 09:46
양산의 예술가들, 도예가 박상언

양산시립박물관에서 개인전시회 소망




예술을 하는 이들이 태어난 곳은 풍수지리상으로 문화적인 곳일까. 도예가 박상언(49) 씨가 똬리를 틀고 앉은 마을을 보고 든 생각이다. 



토향재, 흙 향기가 있는 집은 상북면 대석마을에 있다. 국도35호선을 타고 가다 홍룡사 이정표를 따라 가면 마을 들머리에 소나무 수 그루가 하늘을 향해 창창히 서 있다. 그 한 켠 홍룡사와 대석마을 갈래 길에는 장승 몇 기가 서있다. 성황당이다. 주민들이 마을을 들고 나며 후손들의 무병장수를 빌고 동제를 지내던 곳이다. 게서, 마을 고샅을 돌아가면 대나무 산을 병풍처럼 두르고 있는 토향재가 있다.

그가 나고 자란 마을은 이처럼 홍룡사를 지척에 두고 있으면서 상여 나가는 소리를 재현하고 당산과 장승 등 우리 민속문화를 소중히 하는 예향이 깃든 마을이다. 게다가, 그의 집안도 예능의 피가 흐르지 싶다. 자신을 도예의 길로 이끈 게 사촌형이다. 큰 형인 박성호 씨는 태평소와 꽹과리를 다루며 이팝풍물패를 지도하는 전통문화 예인이다. 큰 조카는 이태리에서 성악을 작은 조카는 그림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


신랑이 구운 도자기에
국화차 우려내는 각시
  


자신이 나무로 직접 지은 갤러리 겸 손님맞이 방에 앉았다. 동갑내기 부인 정선량 씨가 자신이 키우고 있는 국화차를 내왔다. 차향처럼 은은한 심성을 머금은 이들이 이야기보따리를 풀었다. 
 
부산에서 도자기를 굽던 그는 10년 전, 고향 대석마을로 돌아왔다고 한다. 흙처럼 유순한 그와 깨진 유리처럼 날카롭고 각박한 도시가 맞지 않더란다. 누구에게나 그렇지만 고향만큼 마음자리 편한 곳이 있으랴 했단다.
  
흙살 주무르고 살을 태워 
가마 불씨 얻고 나면
지글지글 타 들어가는 가마굴로
또 다시 긴긴 기다림과
텅 빈 바람 한자리


부족한 듯
모자란 듯
헛도는 듯
보이지 않는 이면을
더듬느라 하룻밤에
아홉 번의 강을 건넌다.  


그가 애송하는 이 시처럼 도예의 길에 들어 선지 어느 듯 30여년이다.

스무 살 무렵 부산에서 사촌형에게 도자기를 배웠다. 몇 년, 물레 돌리는 재미와 황홀한 가마 불빛에 빠져있던 그에게 발달장애인들이 생활하는 천마재활원에서 원생들에게 도자기 빚는 걸 가르쳐 달라는 제안이 왔다. 사회 일각의 편견과는 달리 원생들은 비장애인에 비해 사고력이 좀 못 미칠 뿐 마음결이 곱기만 했다. 그런 이들과 동거동락하며 도자기를 만들었다. 순수한 사람들이 만드는 순수한 도자기, 그야말로 순수의 시절이었다.

그런 어느 날, 재활원에 자원 봉사를 나온 처녀와 눈이 맞았다. 연애하고 결혼을 했다. 아들도 하나 두었다. 그렇게 가족이란 이름과 함께하는 소탈한 행복에 안존하던 그에게 목마름이 찾아왔다. 월급을 받고 장애인을 가르치는 일이라 자신의 작품을 빚을 시간도 의욕도 없이 그냥 직장인이 돼 가는 제 모습을 보고 소스라쳤단다.

그 길로, 아내와 아이를 두고 일본으로 건너가 아리따 요업대학교에 들어갔다.

일본, 아리따 요업대학 유학


사람들이 왜 하필이면 일본이냐고 했다. 도자기 관련 책을 보더라도 우리나라보다 일본에서 펴 낸 도예서적이 도자기 장인들의 세계까지 체계적으로 잘 정리돼 있더란다. 우리나라 도공들이 가르친 일본 도예지만 기본과 체계를 중요시 하는 일본 도예를 배워야겠다는 생각에서였다.

특히, 아리따를 선택한 건 일본에서 백자를 처음 시작한 곳이기 때문이란다. 더구나 아리따로 끌려간 조선 도공 이삼평이 자신이 알고 있던 것과는 달리 백자는 흙이 아니라 돌을 갈아서 만든 것이라는 걸 아리따에서 알게 됐다고 한다. 이런 내력과 백자를 주로 하는 아리따 인근 카라츠에서는 분청계통 도자기를 많이 하고 있어 백자와 분청을 다 배울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정작 일본으로 건너가서는 애초 마음 갔던 아리따보다 카라츠 도예에 끌리더란다. 보기에 화려해 보이는 백자는 거리감이 느껴졌고 가라츠 분청이 정서에 더 와 닿더란 것이다. 

아리따요업 대학교에서 공부를 하면서도 매주 주말이면 가라츠지역 도공을 찾아다니며 교분을 쌓고 견문을 넓혔다. 이때 인연으로 지금도 가라츠 작가들과 교환 방문과 교환 전시회를 하고 있다. 2014년에는 카라츠에서 온 작가들이 일주일 정도 서운암에서 도자기 빚는 작업을 했다. 일본 작가들은 도자의 뿌리를 한국이라고 생각하기에 한국을 좋아하고 옛날 가마를 찾고 싶어 해서 이들이 오면 양산의 가마터를 찾아다니기도 한다. 




조선 초, 분청사기 재현 꿈


그는 분청사기 작업에 주력하고 있다.

조선시대 초기에는 분청사기가 주였고 궁에서는 각 지역 도자기를 공납 받아썼다. 양산에서도 호포에 있던 가마에서 분청사기를 만들었다. 그때의 분청사기를 재현하고 싶은 바람이다. 태어난 곳이 양산이고 부모와 형제들이 살고 있는 곳이며 자신이 선호하는 분청사기를 생산했던 곳, 더구나 고 신정희 선생을 비롯해 훌륭한 사기장들이 많은 고장이 양산이다. 해서, 양산 분청사기를 복원할 요량으로 짬만 나면 가마터와 흙을 찾아 양산을 누빈다.

특히, 그가 가마터를 찾아다니는 건 다 이유가 있다. 옛날 도자기 기법이나 형태, 색을 보는 것과 흙을 찾는 것이다. 요즘은 교통 발달로 흙을 조달하기 쉽지만 예전에는 가마터 인근 흙을 이용해 도자기를 만들었다. 그러니 가마터를 찾으면 그 인근에 좋은 흙이 있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화제마을에서 옛 가마터를 찾았다. 그 인근에서 캔 흙으로 점력 실험이 끝나면 옛날 분청사기 느낌이 나는 작품을 만들어 전시회를 할 계획이다. 그 전시회는 역사성이 있는 시립박물관을 염두에 두고 있다.


도자기는 보는 게 아니라 쓰는 것


그는 눈으로 보는 도자기보다 실생활에 쓸 수 있는 도자기를 추구한다. 사발과 차 도구 등 무엇이던 모셔 놓는 게 아니라 일상으로 쓰는 것이 그릇에 생명을 불어넣어 준다는 생각이다. 유럽이나 일본은 그릇을 쓰는 게 목적인데 우리는 장식용으로 비치해 놓는 문화라 매우 못마땅하다.

작가들 또한 고가의 작품만이 아니라 일반 대중이 생활에서 쓰는 자기를 많이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다시 말해, 생산과 소비가 선순환 구조를 이뤄야 작가나 대중이 상생하고 그럴 때 도예문화도 발전한다는 것이다.

자신의 정신 뿌리인 양산의 도예, 그 중에서도 조선 초 분청사기 재현을 꿈꾸는 도예가 박상언은 일정한 틀 속에 갖친 정형화를 거부하며 늘 새로운 도예를 실험하고 있다. 마침내 그 실험이 끝나고 온전한 자신의 작품 세계가 무르익은 머지않은 날에 우리는 시립박물관 전시실에서 그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한관호 기자
hohan1210@ysnews.co.kr




박상언

-상북면 대석마을에서 태어나 살고 있음.
-미협, 공예가협회 회원.
-동원과기대 평생학습원 강사.
-일본 사가현 2인전 등 전시회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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