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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강숙 희망웅상 홍보분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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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로 불과 한 시간 거리일 뿐인데 그렇게 결정하는 데 3년이 걸렸다.
큰 아이 초등학교 입학과 함께 그동안의 평화는 깨지고 전쟁이 시작됐다. 알림장은 왜 다 써야 하는지 (“엄마, 내게 필요 없는 건 안 쓰면 안 돼요?”), 점심밥은 왜 빨리 먹어야 하는지(“엄마, 밥을 빨리 먹으면 스티커를 줘요. 밥 빨리 먹는 게 왜 좋은 거예요?)”, 책은 40분마다 왜 계속 바꿔야 하는지(“엄마 근데 나는 뭐든 좀 늦잖아요. 겨우 재밌어지려고 하면 종 치고 종 치면 또 완전 다른 책을 꺼내야 돼요. 재밌는 거를 계속하면 안 돼요?”) 등 이런 질문이 쏟아졌다.
단체 생활 운운, 타인에 대한 배려를 운운하며 야단도 쳐 보고 어르기도 해 보고 선생님의 미움에서 아이를 좀 벗어나게 하려고 학교에 가서 청소도 열심히 해 봤지만, 아이에게도 나 스스로에게도 명확한 설명을 할 수가 없었으므로 얼마쯤 하다가 곧 시들해졌다. 다행히 아이는 학교라는 곳이 얼마나 엄청난 권력을 지닌 곳인지 스스로 금방 깨달았다.
‘끊을 수 없다!’
검도도 미술학원도 다니다가 재미없으면 끊을 수 있었는데 이 학교라는 곳은 그것이 안 되는 것이다. 알아차리긴 했지만, 몸에 밴 자유분방이 쉽게 고쳐질 리 없으니 수없이 다양한 종류의 온갖 야단을 맞고서야 1학년을 끝낼 수 있었다. 2학년 땐 남자 담임 선생님이라 좀은 편하게 1년을 보냈고 3학년은 한결 여유 있었다.
그런데 그렇게 학교에 적응해 가는 아이를 보고 있자니 갈수록 내 마음이 편치 않은 거다. 목숨 걸고 적응해야만 하는 이 학교는 과연 신뢰할 만한가. 선생님 요구에 맞춰 아이의 타고 난 본성까지 바꿔야 할 만큼 선생님은 존경스러운 분인가.
급기야 아이가 4학년이 되고 나니 같이 놀 친구가 없었다. “너 놀 수 있어?” 이런 전화를 서너 통 하고서야 겨우 놀 친구를 찾는데, 그나마도 30분쯤 놀고 학원 차 앞까지 친구를 배웅해 주고는 처진 어깨로 집에 와선 다시 또 전화해 대는 날이 이어졌다. 초등학교 4학년이 친구와 맘껏 놀 수 없다니! 그 상황이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더 이상 적응도, 타협도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 아이들 그림책 중에 ‘야, 우리 기차에서 내려’란 제목의 책이 있었는데 내겐 마치 화두처럼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자유와 실수와 개성과 고민에 대해 전혀 호의적이지 않은 학교라는 기차에서 두 아이를 데리고 내리고 싶었다.
아이가 1학년 때 창간한 대안교육 잡지 ‘민들레’, ‘녹색평론’, ‘작은 것이 아름답다’ 등 아이와 함께 시작한 공부가 가리키는 해답은 분명했다. 아름다운 자연 속에 적정 규모의 마을과 학교가 있는 곳을 찾아 이 광폭한 속도로 달리는 기차에서 내리는 것. 그랬다. 자동차로 불과 한 시간 거리로 단지 ‘서울’을 벗어났을 뿐인데 모든 문제가 일망타진, 만만세였다.
학교 운동장에서 공을 뻥 차면 축구공이 팔당댐 호수에 빠질 것도 같은, 전교생 100여명의 아름다운 학교에서 두 아이는 해 질 때가 돼서야, 그야말로 딱 죽지 않을 만큼 신나게 놀다 집으로 돌아왔다. 일주일에 서너 번은 퇴근 시간이 새벽 한 두 시였던 일 중독 남편도 출퇴근 거리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술도, 회식도, 야근도 뒤로 하고 이른 퇴근을 할 수밖에 없었다.
나로 말하면, 생애 처음으로 가슴 뛰는 공부를 찾았다. 나무, 풀꽃 이름 외우기, 철철이 장아찌 담기, 내 손으로 농사짓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