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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시민신문

[양산의 예술가들] 정가 소리꾼 이한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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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의 예술가들] 정가 소리꾼 이한은

양산시민신문 기자 입력 2015/06/02 11:26 수정 2015.06.02 11:23
자아를 다스리는 음악 ‘정가’ 그가 곧 정가




국화야, 너는 어이 삼월 동풍 다 보내고/ 낙목한천에 네 홀로 피었느냐/ 아마도 오상고절은 너 뿐인가 하노라. 

심연에서 길어 올린 소리가 끊어질 듯 자지러들다 장고 가락을 타고 넘는다. 그렇다고 정선아리랑처럼 처연하거나 밀양아리랑처럼 신명나지 않다. 무어랄까, 지리산 깊은 산 속 돌 틈에서 솟아나 유유히 흐르다 잦아들기를 반복하며 마침내 바다에 이르러서는 침잠하는 강물이라 할까. 유유하면서도 때론 화려하고 또 청아한 소리, 이를 일러 정가라 한다. 정가는 가곡과 가사와 시조 세 분야를 말하며 범패, 판소리와 더불어 우리나라 3대 성악이다. 
 
전주대사습 시조 부문 장원
양산 문화품격 높여


이 정가로 양산의 문화예술 품격을 전국에 떨친 이, 그가 이한은(59) 씨다.
2014년, 전북 전주시에서 열린 제40회 전주대사습놀이전국대회 시조 부문 경연에서 장원을 했다. 익히 알듯이 전주대사습놀이는 전통과 역사를 자랑하는 우리나라 최고 대회라 전국에서 내로라하는 명창 급 소리꾼들이 다 나온다. 

그는 전주 한옥마을에서 열린 결승 무대에서 쟁쟁한 소리꾼들을 재치고 완제사설 ‘명년’과 엮음질음 ‘푸른 산중’을 읊어 심사위원으로부터 최고 점수를 받았다. 무려 8년 동안 이 대회에 도전한 끝에 맺은 결실이라 그 의미가 더 값졌다.



우연히 들은 단소 소리에 이끌려 
고민순ㆍ정경태에게 소리 배워 


대한시조협회 양산시지부를 창립하고 지부장을 맡아 줄 곳 전통문화 계승과 후학 양성에 여념이 없는 그의 소리 인생길을 따라가 보았다.  

그는 충청북도 충주에서 태어났다. 스무 살 넘어, 서울에서 음악 공부를 하려던 그는 ‘여자가’라는 시대 흐름을 반영이라도 하듯 아버지에게 잡혀 마산으로 내려갔다. 부모님이 수출자유지역에서 회사를 경영하게 된 터였다. 

꿈이 접힌 그는 무위도식하며 지내고 있었다. 올케는 이런 그가 안타까웠던지 시장을 보러갈 때면 시내 구경이나 하라며 데리고 나섰다. 그날도 시장가는 길, 어디선가 단소 소리가 골목을 타고 흘렀다. 소리 할 운명이었던가, 애달픈 단소 소리에 이끌려 가니 한 노인이 연주를 하고 있었다. 노인은 그를 대청마루에 불러 안치더니 “소리 한 번 받아봐라” 했다. 노인이 던지는 소리를 그가 받고, 그렇게 소리가 오고 가기를 한참, “석 달만 소리를 배워 보겠느냐”고 했다.

그저 취미로 단소나 불고 시조나 읊조리는 노인일줄 알았던 그 분은 백광 고민순, 그에게 소리를 가르친 첫 스승이다. 백광의 스승은 석암 정경태 선생, 중요무형문화제 41호 가사 기·예능 보유자로 시조창 한 자락 하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머리를 조아리는 대가다. 후일, 스승 백광이 미국에 가 있는 동안에는 석암 선생에게도 소리를 배웠다. 

석암 선생은 대중가요에 밀려 잊히던 우리 전통 소리가 맥을 이어가길 바랐다. 시조창을 하는 이들을 규합해 1966년, 대한시조협회를 창립한 분이다. 정가 악보를 만들고 시조창을 통일했다. 그이도 석암선생이 소리를 쉽게 배울 수 있도록 창안한 선율선보로 소리를 배웠다.


결혼 후 소리 접었다가 
고난 극복하려 다시 시작   


대나무 우산이 못 쓰게 되면 칼로 깎아 퉁소를 만들어 불던 아버지, 그 피를 이어받았을까. 4년간 한 눈 팔지 않고 소리에 빠져 살았다. 헌데, 슴벅 슴벅 나이를 먹자 가족들이 결혼을 재촉했다. 부산에 사는 남자와 선을 봤고 사랑에 빠졌고 결혼을 했다. 그리곤 아이들이 태어났다. 그는 가족이란 행복을 얻었다. 대신, 소리는 잃었다.

평온한 일상이던 그에게 시련이 찾아왔다. 남편 사업이 기울었다. 그도 무엇이던 일을 해야만 했다. 그렇게 척박한 하루하루를 살아내는 일상이 반복됐다. 대부분 고난이 닥치면 마음 자락을 놓기 일쑤지만 그이는 무너지고 싶지 않았다. 현실을 극복할 버팀목이 필요했다. 그에게 힘과 위로가 되는 것, 그동안 까맣게 잊고 지냈던 소리가 있었다.

부산의 유명한 소리꾼, 손석 조남규 선생을 찾아가 다시 소리 공부를 시작했다. 후산 이후권, 노승선 선생에게서도 소리를 농익혔다.

2001년, 양산으로 이사를 했다. 북부동에 식당을 냈다. 남편과 식당을 운영하는 짬짬이 부산을 오가며 조남규 선생 조교로 후배들을 가르쳤다. 부산시조연합회 일원으로 공연 등 소리 활동을 펼쳤다. 정가 계통에서 제법 소리 잘하는 사람으로 이름이 알려졌다.    


부산대, 한국음악학 공부 중  
반듯한 연습실 하나 소원
    


하지만 정작 자신이 살고 있는 양산은 정가 불모지, 팔을 걷어 붙였다.
대한시조협회 양산시지부를 창립하고 지회장을 맡았다. 자신의 이름을 딴 한은정가진흥회를 만들어 정가를 가르치고 있다. 삽량문화축전 때는 전국 소리꾼들을 불러 모아 박제상 추모 전국정가대회를 열고 있다. 제자들을 이끌고 전국 정가 경연대회에 나가 기량 향상을 꾀한다. 그의 소리 내공은 국무총리상을 비롯해 상이란 상은 그진 다 받은 것에서 알 수 있다. 제자들이 받은 상도 수두룩하다. 뿐만 아니다, 늦깍이로 부산대학교 한국음악학과 석사 과정을 다니며 득음 경지에 이른 소리에 이론을 뒷받침 하자며 공부하고 있다.

매주 화ㆍ목요일 저녁에는 북부동 금강산 오리정 식당 뒤 골방에서 한은정가진흥회 회원 10여명에게 소리를 가르친다. 

이처럼 소리에서 일가견을 이룬 그, 하지만 그에게도 못내 아쉬운 게 하나 있다. 정가는 발을 접어 꿇고 단정히 앉아 단전에서 소리를 끌어 올려야 한다. 헌데, 소리를 가르치고 있는 대한시조협회 양산시지부 사무실은 사람 다섯 만 앉아도 곽 차는 협소한 공간이라 소리 하기에는 난망하다. 누군가, 어디선가 민속고유문화를 제대로 이어갈 수 있도록 공간 하나 제공해 주길 애타게 찾고 있다.  


“정가는 나를 다스리는 음악”
초등생부터 어르신까지 교육  


정가는 그에게 어떤 의미일까? 그이는 “서양음악은 관중을 즐겁게 하는 음악이다. 이에 반해 정가는 나를 다스리는 음악”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빨리 빨리만 추구하는 시대에 느리고 단조로운 정가는 재미가 없다. 하지만, 본디 음악의 목적은 사람의 마음을 올바르고 고상하게 하는데 있지 않은가”라며 그것이 정가라고 했다. 그이는 또 공자의 말을 빌려 “낙이불음(樂而不淫) 애이불상(哀而不像)이라, 감정이 순화되고 중화되어 치우치지 않는 음악이 정가”라며 기자에게 정가를 배우라고 권했다.  
  
초등학생에서부터 78세 차도용 어르신까지 세대를 넘어 민속악을 배우는 사람들, 그들에게 정가를 가르치는 이한은 선생. 정가, 그가 곧 정가이다.        

한관호 기자
hohan1210@ys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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