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양산시민신문

[詩 한 줄의 노트] 이사
사회

[詩 한 줄의 노트] 이사

양산시민신문 기자 입력 2015/06/16 09:44 수정 2015.06.16 09:41
김순아 시인




 
↑↑ 김순아
시인
한국문인협회 양산지부
 
1.
내가 떠난 뒤에도 그 집엔 저녁이면 형광등 불빛이 켜지고
사내는 묵은 시집을 읽거나 저녁거리를 치운 책상에서
더듬 더듬 원고를 쓸 것이다 몇 잔의 커피와,
담배와, 새벽녘의 그 몹쓸 파지들 위로 떨어지는 마른 기침소리
누가 왔다 갔는지 때로 한 편의 시를 쓸 때마다
그 환한 자리에 더운 숨결이 일고,
계절이 골목집 건너 백목련의 꽃망울과 은행나무 가지 위에서 바뀔 무렵이면
그 집엔 밀린 빨래들이 그 작은 마당과
녹슨 창틀과 흐린 처마와 담벽에서 부끄러움도 모르고
햇살에 취해 바람에 흔들거릴 것이다
눈을 들면 사내의 가난한 이마에 하늘의 푸른빛들이 뚝 뚝 떨어지고
아무도 모르지, 그런 날 저녁에 부엌에서 들려오는
정갈한 도마질 소리와 고등어 굽는 냄새
바람이 먼 데서 불러온 아이 적 서툰 노래
내가 떠난 뒤에도 그 낡은 집엔 마당귀를 돌아가며
어린 고추가 자라고 방울토마토가 열리고
원추리는 그 주홍빛 꽃을 터트릴 것이다
그리고 낮도 밤도 없이 빗줄기에 하늘이 온통 잠기는 장마가
또 오고, 사내는 그 때에도
혼자 방문턱에 앉아 술잔을 뒤집으며
빗물에 떠내려가는 원추리 꽃들을 바라보고 있을까 부러져나간
고춧대와 허리가 꺾여버린 토마토 줄기들과 전기가 끊긴
한밤중의 빗소리........... 그렇게
가을이 수척해진 얼굴로 대문간을 기웃거릴 때
별일도 다 있지, 그는 마당에 신문지를 깔고 앉아
누군가 부쳐온 시집을 읽고 있을 것이다
얼마나 많은 물결을 끌어당기고 내밀면서
내뱉고 부르면서
강물은 숨쉬는가


2.
그 낡은 집을 나와 나는 밤거리를 걷는다
저기 봐라, 흘러 넘치는 광고불빛과
여자들과
경쾌한 노래
막 옷을 갈아입은 盛裝한 마네킹들
이 도시는 시간도 기억도 없다
生이 잡문이 될 때까지 나는 걷고 또 걸을 것이다
때로 그 길을 걸어 그가 올지도 모른다 밤새 얼어붙은 수도꼭지를
팔팔 끓는 물로 녹이고 혼자서 웃음을 터트리는,
그런 모습으로 찾아와 짠지에 라면을 끓이고
소줏잔을 흔들면서 몇 편의 시를 읽을지도 모른다

박영근 시인
1981년 ‘반시(反詩)’ 제6집에 ‘수유리에서’ 등 발표하며 작품 활동 시작. 시집 ‘취업공고판 앞에서’, ‘대열’, ‘김미순傳’등이 있다.

--------------------------------------------------
엊그제 시를 다 써버린 김보안 시조 시인을 생각하며 이 시를 읽는다. 제자와 문인들에게 든든한 언덕이자 영혼의 스승이 돼 주셨던, 내게는 학문의 길에서나 시의 길에서 언제나 함께 해주셨던 은사님.

언젠가 누군가의 장례식에 참석했을 때 ‘인생 참 터무니없이 짧구나’ 쓸쓸하게 웃으시더니 세상 마지막 저녁을 어떻게 보내셨을까.

여느 날처럼 조금, 아니 미칠 듯 쓸쓸해서 어두워져 오는 어느 길 끝으로 대중없이 걸어갔을까. 가도 가도 별 하나 보이지 않아 그만 길가에 주저앉아 어둔 하늘만 망연히 바라보았을까. 옷깃 파고드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일어나 쓸쓸함 가득한 빈 집으로 돌아갔을까. 문을 열고 들어가, 아아 죽은 듯 잠들었을까.

먹먹한 가슴으로 파고드는 새소리가 온통 哭소리다. 부디 영면하시길…!

저작권자 © 양산시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