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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시민신문

[희망웅상 행복한 세상] 고독의 발명..
오피니언

[희망웅상 행복한 세상] 고독의 발명

양산시민신문 기자 입력 2015/06/16 09:52 수정 2015.06.16 09:48
이강숙 희망웅상 홍보분과



 
↑↑ 이강숙
희망웅상 홍보분과
 
큰 아이 중학교 1학년, 작은 아이가 초등학교 4학년 때, 남편이 회사에 사표를 내면서 온 식구가 무슨 소풍이라도 떠나듯 들떠서 이사한 곳이 소백산 자락. 여우가 마지막까지 나왔다고 ‘여골’이라고 불리는 마을이었다. 이사 떡을 돌리다 가끔 눈을 들어 보면 온 산에 밤꽃이 피었던 게 기억난다. 유월, 딱 이 무렵이었다.

혼자 사시던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비어 있던 작은 시골집을 몇 개월 걸려 시나브로 손을 봐 살게 됐으니 가져갈 수 있는 짐이 많지 않았다. 그럼에도 방 하나에 큰 아이 피아노를 놓았다.

큰 아이가 다니던 학교는 한 학년에 한 반, 열두 명으로 그중에 여학생은 8명이었다. 친구와 놀려면 산을 두 고개는 넘어야 하니 큰 아이는 학교에서 돌아오면 그저 피아노를 치며 놀았다.

피아노는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산골로 이사 오기 직전까지 꾸준히 배웠는데, 선생님이 아이가 절대음감이라는 둥 악보를 빨리 본다는 등 말을 해 줬지만, 밖에서 친구와 축구하고 뛰어다니는 시간도 부족했으니 피아노는 겨우 숙제하는 정도였다.

그런데 산골에서 아이는 생애 처음으로 심심했던 모양이다. 학교 갔다 오면 닭 모이도 주고 겨울엔 나무도 해야 하고 눈도 쓸어야 하는 등 할 일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닌데, 산골로 가자고 했을 때 제일 먼저 생각한 게 사실 이거였다. ‘좀 심심하게 멍청하게 할 일 없이 있어 보기!’.

‘최선을 다하자’, ‘높이 나는 갈매기가 멀리 본다’, ‘인내는 쓰다. 그러나 그 열매는 달다’. 어릴 때부터 고민도 없이 들어 왔던 말, 높이 날기 위해 누구보다 최선을 다했지만, 이 표어에 전적으로 동의한 것은 아니었다. 내가 그렇게 살았던 것은 장손을 기다리던 집안의 천덕꾸러기 셋째 딸로 태어나 어른에게 사랑받을 짓을 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처지라는 걸 일찌감치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 아이들을 키우면서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아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자기 본능에 충실한, 오로지 자기 행복에 민감하고 그에 솔직하게 반응하는 큰 아이가 아니었다면 내가 자란 똑같은 방식으로 아이들을 키웠을 것이다.

‘최선을 다하고 있는가’가 아니라 ‘행복한가’하고 물어야 하며 ‘높이 날고 있는가’가 아니라 ‘네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는가’하고 물어야 한다. ‘달콤한 열매를 위해 잘 참고 있는가’가 아니라 ‘지금 당장 하루를 달콤하게 살고 있는가’하고 물어야 한다. 나는 서른이 넘어 아이들을 키우면서야 비로소 자신에게 이런 질문을 할 수 있게 됐다.

심심한 산골생활에서 드디어 큰 아이는 운명의 친구, 불멸의 친구를 발명(?)했다. 산골에 피아노 선생이 있을 리 없으니 C D를 틀어 놓고 악보를 보며 베토벤과 쇼팽, 라흐마니노프를 공부했고 주야장천 피아노만 두들겨 대는 날이 끝도 없이 계속됐다. 방학 땐 아예 열 몇 시간을 손바닥만 한 방에서 두문불출했는데, 지금도 그 시절을 기억하면 모든 풍경 속에 늘 큰 아이의 피아노 소리가 있다.

그렇게 두 번의 겨울을 보내고 아이는 예술중학교 편입 시험을 봤고 합격했다. 우리 가족은 여러 다른 상황과 함께 산골을 떠나 남편 고향인 양산으로 와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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