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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양산의 예술가들, 모래조각가 김길만
나무젓가락 하나로 모래에 숨결을 불어넣는다

양산시민신문 기자 입력 2015/07/07 10:37 수정 2015.07.07 10:34































달랑 나무젓가락 하나로 모래 더미를 이리저리 휘적이자 금방이라도 날아오를 듯 한 새 한 마리가 빚어진다. 어디 그 뿐이랴, 그의 손길이 닿기만 하면 모래 알갱이가 바다 속 용궁으로 잡혀간 토끼로 부활하고 정교하기 이를 데 없는 기왓장을 두른 한옥 한 채로 서고 구름을 타고 승천하는 용, 어린왕자가 된다. 무생물인 모래에 생명의 숨결을 불어넣는 김길만(56) 모래조각가. 

경주에서 태어난 그는 사실 화가가 되고 싶었다. 중ㆍ고등학교를 다닐 때 미술 시간이 되면 그림 그리는 게 그렇게 좋았다. 헌데, 집안 형편은 돈이 많이 드는 붓 대신에 돈을 벌어주는 기계 공구를 들게 했다. 양산 교동에 있는 삼양화학에 취업해 평범한 직장인으로 살았다. 친구와 해운대로 바람 쏘이러 나갔다가 운명처럼 모래와 만났다. 해운대 백사장에 앉아 모래를 만지며 노는데 감촉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더란다. 장난삼아 어릴 때 소꿉놀이 하듯 인어공주 상을 만들어 봤다. 사람들 감탄이 쏟아졌다. 조각을 배운 적이 없는 터라 눈, 코, 입도 만들지 못한 얼굴인데도 말이다.


송정해수욕장이 연습실


시간만 나면 사람이 별로 없는 송정해수욕장으로 가 모래와 놀았다. 가재, 문어, 고래, 사람 얼굴, 건축물 등 닥치는 데로 조각을 하고 허물어지는 일상이 수없이 반복됐다. 돈이 되는 일도, 누가 알아주는 것도 아니었다. 모래조각 교재도, 가르쳐 주는 이도 없었다. 그저 좋았다.

하루는 정신없이 모래 조각에 빠졌는데 집에 가려고 보니 신발이며 소지품이 없어졌더란다. 나들이 나온 사람들이 그의 모래조각을 구경하러 몰리는 바람에 장사에 지장이 있다며 그를 고깝게 여긴 상인 누군가가 소지품을 숨겨버린 것이었다. 맨 발로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오기가 발동했다. 그래, 끝까지 한 번 가보자. 그렇게 한 해, 두 해, 짬만 나면 송정으로 나가 모래와 뒹굴었다.

그때, 비가 와도 모래가 무너지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눈이 오면 모래 알맹이가 얼음처럼 조각을 못할 정도로 차가워진다는 것도 알았다. 여름이나 봄, 가을에 비해 겨울 모래색이 더 좋은 것도 터득했다. 여름엔 햇살이 너무 강렬한데 겨울 오후 3시경, 햇살이 사위어가는 그 시점에 모래가 금빛으로 드리우며 환상적이란 걸 알았다.


작품, 중ㆍ고 미술 교과서에 실려 


1987년 모래조각을 시작해 어언, 28년의 시간이 흘렀다.

1995년, 지방자치제가 시행되고 지자체 마다 앞 다투어 축제를 열면서 그를 찾는 곳이 많아졌다. 축제뿐만 아니라 서울 (주)애버랜드 초청 모래조각 시연, 강원도 양양 낙산비치호텔 초청 모래조각 시연, 해운대 아쿠아리움과 조선비치호텔 초청 모래 조각 시연, 2006년 부산 벡스코 대한민국 축제박람회 모래조각 시연, 한국 어항협회 초청 서울 코엑스 모래조각 시연, 대구mbc 출연, 서울 코엑스 내나라 여행 박람회 모래조각 시연 등 일일이 열거하기 어렵다. 나아가, 1998년 중국 용정 해란강에서 광복절 기념 모래조각 시연, 2000년엔 미 한인회 초청으로 미국 시카고 몬트로스 호변에서 모래조각 시연을 펼쳤고 시카코 ‘썬 타임지’ 1면과 ‘트리분지’에 한국모래조각가로 소개됐다.

장승 꾼이나 화가는 차고 넘치지만 모래조각은 우리나라에서 그가 유일했다. 자고 나면 허물어지고 없을 모래조각을 왜 하냐며 비싼 밥 먹고 할 일없는 미친놈이라던 시중의 비아냥은 찬사로 바꼈다.



나무젓가락 조각 세계 유일


문화예술계에서도 비로소 모래조각을 예술의 한 분야로 받아주었다. 그의 작품 ‘바닷 가재’는 중학교 미술 교과서에, ‘해마다 꾸는 꿈’은 고등학교 1학년 미술교과서에 실렸다. 전국에서 청소년 17만명이 그의 작품을 보며 미술 공부를 하는 셈이다. 그가 중ㆍ고등학교 때 토속적인 박수근 작품과 파란색 물감을 많이 쓰던 김환기 작품을 동경하면서 자랐듯 17만명 중 단 한사람이라도 자신의 작품을 보며 꿈을 키웠으면 하는 바람이다.
모래 조각가가 우리나라에는 드물지만 외국에는 꽤 많이 있다. 그런 모래조각가들 중에서도 그는 남다르다. 외국 작가들은 금속성 모래조각 칼을 여러 개 사용한다. 한 싱가포르 작가는 무려 14개의 조각칼을 쓰더란다. 세밀한 부분을 새기는 가는 칼에서 선이 굵은 큰 칼 등 다양하다.

하지만 그의 작업 도구는 딱 하나, 나무젓가락이다. 다른 모래 조각가들도 세밀하고 때론 선이 굵직한 작품 모두를 나무젓가락 하나로 빚어낸 걸 알고는 놀라워한다. 처음엔 손으로 모래를 빚었다. 그런 어느 날, 핫도그를 먹으며 모래조각을 구경하던 어린이가 자신 앞에 나무젓가락을 버렸다. 그걸 주어들고 모래조각을 해보니 빗살무니처럼 자연스런 곡선을 표현할 수 있더란다. 나무젓가락은 각이 있고, 연필처럼 그릴수도 있고. 깎아내고, 모래찌꺼기 제거도 가능했다. 그렇게 자신만의 조각칼과 조각기법을 창안했다.


양산천에서 모래조각 빚고파 


그저 심심해서 만져 본 모래, 그게 조각으로 승화됐다. 땀 흘린 것만큼 명성을 얻었고 수고로움도 보상받는다. 그런 그이지만 소박한 바람 하나가 있다. 굳이 해운대 백사장까지 나갈 것 없이 양산에서 양산시민이 즐거워하는 모래조각을 하고 싶다.

모래를 8톤 덤프트럭 두 대분만 양산천에 부려주면 된단다. 양산천에도 새로운 볼거리가 생기고 유채축제, 삽량문화축전을 더 풍성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더불어 연필 하나도 스스로 못 깎는 어린이들, 스마트폰 터치만 하고 놀아 엄지손가락만 발달한 아이들 감성을 일깨우고 손재주를 가르치고 싶다. 양산시에서 자신을 활용해주길 바라고 있다.


선녀와 나무꾼 작품 준비 중 


그는 하루 만에 다 끝나는 모래조각은 아무리 잘 만들어도 습작으로 치부한다. 최소 1박 2일 정도는 심혈을 기울여야만 작품성을 살릴 수 있다는 것이다. 별주부전은 14박 15일 걸려 완성했다. 작품 소재를 구상하고 그 구상을 스케치 하는데도 꽤 많은 고민과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는 동화, 선녀와 나무꾼을 작품화 할 계획이다. 단순한 볼거리가 아니라 모래 조각에 이야기를 입히고 싶어한다. 부조 같으면서도 환조같은 느낌이 드는 작품, 다시 말해 벽화 같은 모래조각이 아니라 동상같은 모래조각품을 만들고 싶다. 

그는 지금까지 1천250여점의 모래조각품을 만들었다. 그 중 가장 애착이 가는 작품은 ‘모래 여인상’이다. 모래로 입술, 코, 눈 쌍커풀까지 이토록 세밀하게 표현했을까하는 찬사를 받은 작품이다.  

독학으로 이룬 모래조각, 가끔은 파도가 가져가고, 때로는 모래가 마르면 바람이 가져간다. 또 어떤 때는 바닷물에 작품이 스러진다. 그렇게 부질없는 모래조각, 하지만 그는 이번 주말도 모래가 있는 백사장으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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