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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순아 시인 한국문인협회 양산지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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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은 타버린 무명옷으로 굽이치지
애인도 나만의 방도 없었지만 시간은 많다고 느꼈지
여린 풀잎이 바위도 들어올릴 듯한 시절
열렬하고 어리석고 심각한 청춘시절은 이제 지워진다
언덕을 넘고, 밧줄 같은 길에 묶여 나는 끌려간다
광장의 빈 의자처럼 현기증을 일으키며 생각한다
지금 나는 무엇인가?
내가 원했던 삶은 이게 아닌데
사랑이 없으면 시간은 죽어버리는데
옷장을 열어 외출하려다 갈 곳이 없듯
전화할 사람도 없을 때의 가슴 그 썰렁한 헛간이란,
-헛간 속을 들여다봐 시체가 따로 없다구
사람을 만나면 다칠까봐 달팽이가 되기도 하지
잡지나 영화도 지겹도록 보아 그게 그거 같고
내가 아는 건 고된 노동과 시든 꽃냄새 나는 권태,
내일은 오늘과 다르리란 기대나
애정이나 행복에 대한 갈망만큼 지독한 속박은 없다
나라는 연장을 어떻게 닦아야 하나
신현림 시인
1961년 경기 의왕에서 태어나 1990년 ‘현대시학’에 시를 발표하며 문단에 데뷔했다. 시집으로 ‘지루한 세상에 불타는 구두를 던져라’(1994, 세계사), ‘세기말 부르스’(1996, 창작과 비평사), ‘해질녘에 아픈 사람’(민음사, 2004), ‘침대를 타고 달렸어’(민음사, 2009)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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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복되는 일상에서 느끼는 권태와 우울, 사랑에 대한 갈망이 짙게 배어있는, 그러면서도 자기 갱신에 대한 치열한 몸부림이 느껴지는 시입니다. 시의 ‘그녀’는 생의 중간지대에 이른 시인 자신과 겹쳐 보이는데요, ‘내일은 오늘과 다르리란 기대나/ 애정이나 행복에 대한 갈망만큼 지독한 속박은 없다’는 읊조림이 참 쓸쓸하게 다가오네요.
살아가면서 누구나 한두 번쯤 경험하게 되는 ‘슬럼프’, 그 속에서 때로는 시체(屍體) 같은 자신을 보게도 되지만, 그것이 또 한편으로는 자기 성찰의 기회가 되기도 하는 것이어서, 시인은 이렇게 시체(詩體)를 남기게 되나 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것이 그저 얻어진 것은 아니라는 점이겠지요. 이 시체(詩體)를 얻기 위해 시인은 아마도 숱한 곡절을 견뎌냈을 겁니다. 헛간 같은 외로움과 우울을 견뎌내는 것, 그 우울한 풍경 속에 자신의 세계를 구축하는 것, 지금도 시인은 아마 그런 풍경 속에서 자신의 실존적 깃발을 펄럭이며 서 있을 것 같습니다.
마지막 연의 ‘나라는 연장을 어떻게 닦아야 하나’하는 구절이 더욱 짙은 여운을 남기는, ‘슬럼프에 빠진 그녀의 독백’ 앞에서 문득 경건해지는 아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