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 박성진 본지 논설위원 | ||
ⓒ |
양산시는 삼장수 명칭 사용에 문제가 있을 줄 몰랐다고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지만, 문중의 강경한 입장으로 비춰 ‘삼장수빵’은 탄생하기 어려울 것 같다.
현대에 이르러 고유의 예술작품이나 상표, 구체화한 아이디어 등에 대한 임의 사용을 엄격히 제한하고 있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런 때에 상업적인 목적으로 삼장수 명칭을 사용하고자 하면서 후손의 동의를 구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시행하려 한 시의 안일한 처사는 비난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욱 개탄스러운 것은 삼장수 설화에 대한 관광자원으로서 접근방식이 아닐 수 없다.
우리 고장의 역사는 멀리 가야와 신라의 대치 시점까지 올라간다. 당시 삽량주 또는 양주로 불렸던 양산은 경주 다음가는 큰 도시로 신라를 지키는 변방의 보루 역할을 했던 곳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 시기에 양산의 간(干, 행정책임자의 뜻)으로 있던 관설당 박제상 공 활약이 눈부시다.
박제상 공은 당시 고구려에 볼모로 잡혀 있던 눌지왕의 아우 복호를 구출해 온 데 이어 왜국(지금의 일본)으로 건너가 또다시 왕의 아우 미사흔을 신라로 돌려보낸 뒤 자신은 왜왕에 잡혀 불에 타 죽는 형벌을 받았다. 공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상북면 효충마을에 사당이 건립됐으며 지금은 충렬사에 봉헌돼 있다.
삼장수는 조선 초기에 무인으로 이름을 날린 세 형제 이야기다. 하북면 당시 초산리에서 태어난 이징석ㆍ징옥ㆍ징규 삼형제는 모두 무과(武科)에 급제해 무인으로서 최고 품계인 종일품까지 올라 삼형제 장수로 널리 알려졌기에 마을 이름도 삼수리(三帥里)로 바뀌었다.
삼형제 어린 시절 용맹과 호방함을 드러낸 일화가 지금도 곳곳에 남아있다. 하지만 이들의 평가는 둘째 이징옥의 비극적 운명에 의해 오랫동안 부정적으로 각인돼 왔다.
이징옥 장군은 조선 태종 때 무과에 급제해 김종서 장군과 인연을 맺은 뒤 북방 육진 개척에 큰 공을 세웠으나 세조가 일으킨 계유정란 때 김종서 수하로 분류돼 파직당하자 반기를 들어 대금제국 황제가 됐다가 부하 장수에게 죽임을 당한다. 이 때문에 역사에서 반역자로 치부 당해 왔다.
하지만 근년에 들어 이징옥의 대항이 조정에 대한 반란이 아닌 단종 복위 운동의 하나로 보는 시각이 퍼지고, 북방 여진족의 추앙을 받는 대장군으로서 무인의 표상으로 새로이 평가받고 있는 것은 후손이 크게 반길 일이다.
이에 반해 그동안 우리 고장이 낳은 역사 인물에 대한 양산시의 선양사업은 참으로 소홀하고 부진하기 짝이 없었다. 박제상 공에 대해서도 인근 울산시가 사당과 기념관을 건립해 그들의 역사 인물로 내세우고 나서야 대책을 세우려 했지만 시기를 놓치고 말았다. 울산시는 박제상문화제까지 만들어 운영하고 있다.
박제상을 빼앗긴 양산시가 다음으로 주목한 것이 삼장수다. 이 또한 향토 사학자의 오랜 청원이 있어서 가능했다. 그러나 시는 여전히 삼장수 선양사업의 핵심을 찾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시는 몇 년 전 ‘삼장수 기상춤’을 만들어 보급하는 한편 ‘삼장수 밥상’을 개발해 관광상품으로 내놓았다.
하지만 춤은 지역 축제에서 잠깐 보일 뿐이고, 먹거리 메뉴는 대중화가 요원한 상태다. 그러다가 이번 ‘삼장수빵’ 사건이 나온 것이다. 아무래도 앞뒤가 바뀐 형국이다. 익지도 않은 밥을 서둘러 먹으려다 입천장만 덴 꼴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양산시가 삼장수를 이용한 관광 활성화를 원한다면 원점에서 다시 출발해야 한다. 생가를 중심으로 한 설화 배경을 포함해 성역화하는 일부터 시작해 이징옥 장군의 위업을 재조명하는 일련의 사업을 체계화해야 한다.
삼장수에 대한 역사적 사실이나 어린 시절의 무용담 등에 대한 고증도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향토 사학계와의 협의는 물론, 삼장수 후손 문중과도 충분히 논의해 그들의 긍지도 세우고 양산 위상도 높이는 방안을 강구해 나가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