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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양산의 예술가들, 정귀옥 화백
먹, 감당할 수 없는 ‘농담’의 매력이여

양산시민신문 기자 입력 2015/08/25 11:32 수정 2015.08.25 11:27
캔버스, 옷, 가방 등 먹이 닿는 모든 것을 작품으로 승화

지역에 제대로 된 전시장 생겨 시민과 하루빨리 만나고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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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때 등교를 잘 못 할 정도로 몸이 허약했던 한 소녀, 그런 딸이 안쓰러웠던 아버지는 딸이 다니던 학교 교사인 조카에게 딸 중학교 진학문제를 의논했다. 소녀의 사촌 오빠는 “크레파스로 그린 그림을 봤는데 그림에 재능이 있다”며 예술중학교 진학을 권유했다. 정귀옥 화백을 영생여자중ㆍ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원광대학교 사범대 미술교육과에서 한국화를 전공하며 화가의 길을 걸어가게 한 건 일찍이 그의 재능을 알아본 사촌 오빠의 공이었다.

정 화백은 범어초등학교 후문 작은 상가 3층에 미술 학원을 겸한 화실을 두고 있다. 가파른 계단을 오르면 초등학생 아이들이 참새처럼 재잘거린다. 어린이들과 생활해서일까? 올해 예순넷, 머리는 백발이 성성한데 웃음은 딱 여고생인 정 화백이 반긴다. 화가 아니랄까 봐, 손님에게 내어 온 음료수도 색감이 환상인 오미자차다. 얼음 띄운 오미자차처럼 새콤한 삶의 내력을 풀어 놓는 그.


브라질 이민 후 귀국해 다시 잡은 붓


대학교 4학년 때, 지금으로 치면 기간제교사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그러다 금산상업고등학교로 발령, 교사가 됐다. 해맑은 영혼에게 그림을 가르치는 일은 보람있었다. 하지만 이내 결혼을 하면서 교직을 그만뒀다. 자연히 그림과도 멀어졌다. 더구나, 브라질로 이민을 가 8년여를 살았다. 유토피아를 그리며 떠난 브라질, 한데 타국 생활은 너무 힘들었고 결국 향수병을 어쩌지 못해 귀국했다. 한국적인 문화자산이 넉넉한 고장, 무작정 경주에다 똬리를 틀었다. 외국 생활에다 이미 불혹의 나이, 그가 할 수 있는 건 전공을 되살리는 일뿐이었다. 미술학원을 냈다. 게서 4년여를 살았는데 어떤 인연에 이끌려 양산으로 오게 됐단다. 

10여년 만에 다시 잡은 붓, 두려움이 컸지만 다행히 열정이 솟고 신명이 났다. 내친김에 전업주부들을 화실로 끌어내는 일에 매진했다. 그림에 취미가 있거나 중도에 그림 그리기를 그만둔 여성들, 그들이 잃어버린 꿈을 찾고 새로운 삶에 도전하며 역동적으로 살기를 바랐다. 그런 한편으론 가장 ‘한국적인 그림’, 한국화를 그들에게 알려주고 싶었다. 그에게 한국화를 배운 이들은 연우회, ‘먹을 다루는 벗’이란 모임을 만들어 그림을 그리고 전시회도 열었다. 그와 제법 오래도록 연을 나눈 귀한 시간, 귀한 인연이었다.


그의 손이 닿으면 그림이 된다 


그는 첫 개인전을 2005년에서야 가졌다. 그가 세상에 내놓은 수줍은 작품들이지만 미술잡지 아트페어에 호평을 한 기사가 실렸다. 그러면서 외국 생활에 찌든 영혼을 보상이라도 받을 듯 어느 한 영역에 묶이지 않고 창작에 새로운 시도를 해 나갔다. 액자에 표구하면 그림값이 비싸져 일반인이 소장하기 힘들다며 부채에 그림을 그렸다. 부채 그림은 희소성, 보관성, 이동성이 좋고 가격이 높지 않아 특수계층이 아닌 서민도 그림 한 점 가질 수 있게 하고 싶은 생각이었다. 그의 그림 대중화는 계속됐다. 우리 생활 자체가 미술이라며 가방, 커튼, 다포, 옷에 그림을 그렸다. 가방은 직접 만들어 채색하고 물에 빨아도 물감이 빠지지 않도록 특수 안료를 섞어서 그림을 그렸다. 가죽과 같은 느낌이 나면서도 가죽과는 달리 가벼워 전시회에서 동이 나게 팔렸다. 그렇다고 어디서 따로 배운 게 아니라 미술 대중화를 위해 많이 보고 부지런히 연구한 것들이다. 그의 화실 한켠을 차지하고 있는 미싱과 색색의 실들이 이를 대변한다. 


그는 요즘 화선지가 아닌 요철지(한지인데 뭉쳐진 것)와 스카프 실크에 그림을 그리고 있다. 긴 실크 스카프에 그림을 그리면 펴 놓아도 작품이고 목에 두르거나 매고 있어도 작품이 되는 세상에 하나뿐인 작품이다. 새롭고 매력적인 작업에 푹 빠져 있는 그는 다음 개인전 때 선보일 야심작을 준비하고 있다.


수묵담채화의 검은 먹, 매력 있어 


그는 한국화, 그중에서도 수묵담채화를 즐겨한다. 이는 스승인 정승섭 교수 영향이지 싶단다. 스승은 서울대 미대에서 한국화를 전공하고 원광대에서 후학들을 가르쳤다. 한데, 요즘은 한국화니 서양화니 하는 구분이 없어진 듯해 격세지감이다. 서양화도 먹이나 한지를 쓰고 한국화에도 서양 물감을 쓰기도 해 경계가 없는 것 같다고 한다. 예전에 영역, 또는 분야를 너무 엄격히 구분 짓던 관습에서 벗어나 훨씬 자유로워진 풍토가 예술세계를 더 풍요롭게 일구는 토양이 된다는 그의 생각이다.

그는 특히 먹을 중히 여긴다. 단순히 까만색으로만 생각하는 먹, 하지만, 그 까만색에서 나오는 화려함이 좋단다. 컬러풀한 색만 화려한 색이 아니라 무채색도 화려하다고 한다. 순수한 까만색만이 아니라 ‘농담’을 응용해서 아름다운 그림으로 승화시키는 것, 먹을 잘 다루는 것이 곧 그림을 잘 그리는 것이라고 했다. 더구나 서양화는 덧칠을 통해 그림을 보완하지만 한국화는 한 획이 어긋나면 다시 그려야 하는 작업이라며 은근히 한국화의 우수성을 강조한다.

양산에 제대로 된 전시장 있어야


그는 2011 부산진구청 특별초대전, 동서 미술의 현재 전, 영호남 교류전, 양산경찰서 개관기념 특별초대전, 음악, 미술, 사진, 시 어우름전(부산진구청 초대전), 타워 여류전, 경남국제아트페스티벌초대전, 2006 독일 월드컵축제기념 초대전(독일 기포른시 유럽문화박물관), 부산미술의 흐름 초대전 등 수 많은 초대전에 출품하며 왕성한 창작열을 불사르고 있다. 또, 한국미술협회전, 영ㆍ호남 교류전, 양산미술협회전, 경남미협전, 동서미술의 현재전, 경남국제아트페어 전과 경남미술품 경매전에도 작품을 냈다.
 
그는 일본초대전 초대작가상, 국제현대미술창작전 대상, 대한민국미술대전 가작, 대한민국미술대상전(국제공모전)우수상 등을 받았다. 대한민국서화작가협회 초대작가이며 국제미술창작회 초대작가로, 2010년 김해미술대전을 비롯한 제22회 성산미술대전 한국화 심사위원 등으로도 활동했다.

이미 반열에 오른 정귀옥 화백, 그에게 지역 문화예술 창달에 있어 바람이 뭐냐고 물었다. 그는 미술 분야로 보면 양산은 문화 불모지나 다름없다고 한탄했다. 인구 30만인 도시에서 그림 전시장이라고는 문화예술회관 지하가 고작이다. 더구나 그곳은 제대로 된 그림을 전시할 만한 환경이 아니란다. 특히, 200호, 300호 되는 대작은 걸 수 있는 곳이 없다며 인근 김해시나 경주, 울산, 부산에 비해 미술 분야 시설 인프라가 너무 빈약하다는 아쉬움을 토로했다.

한관호 기자 hohan1210@ys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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