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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시민신문

[詩 한 줄의 노트] 겨울이 오래전에 왔다..
사회

[詩 한 줄의 노트] 겨울이 오래전에 왔다

양산시민신문 기자 입력 2015/09/15 10:16 수정 2015.09.15 10:11
김순아 시인



 
↑↑ 김순아
시인
한국문인협회 양산지부
 
겨울이 오래전에 왔다.

연못은 두꺼운 유리처럼 얼었다.

투명한 얼음 안에서도 물은 
숨 쉬고 손가락 같은 물고기들이 움직였다.

수련은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적갈색 잎과 검은 줄기들이 핏줄처럼 얼기설기
얼어붙은 연못을 부여잡고 있다.

생물 표본실 같은 연못

시험관 속에 들어 있는 태아처럼
입 벌린 채 눈 감고 있는 수련의 잎과 줄기들.

응고된 생각과 재갈물린 언어들.

수련은 방부제 섞인 언어 속에
고스란히 잠겨 있지만

여름의 생기와 당신을 자극하는
맹렬한 메시지와 같은 향기는
여름의 뜨거운 공기와 함께 사라져버렸다.

겨울이 오래 전에 왔다.
종이에 얹힌 수련을 읽는
당신의 입김만이 두꺼운 유리 연못을 흐리게 한다.


채호기(蔡好基) 시인
1957년 태어났으며 1988년 〈창작과비평 여름호>를 통해 시단에 나왔다. 시집으로 『지독한 사랑』, 『슬픈 게이』, 『밤의 공중전화』, 『수련』, 『손가락이 뜨겁다』, 『레슬링 질 수밖에 없는』 등이 있으며 ‘김수영문학상’과 ‘현대시작품상’을 수상했다. 현재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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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못’의 ‘물’을 중심으로 존재의 근원성을 성찰하는 시입니다. 연못은 우리가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자연물이지만, 시인의 시선으로 볼 때 연못은 수많은 생명체를 안고 있는 여성의 몸(자궁)과 같은 곳입니다.

연못의 둥근 형상과 물이 가진 의미는 생명의 자궁을 가진 여성의 몸과도 상징적으로도 일치합니다. 그런데 주목되는 것은 시인이 이 연못의 표면을 ‘얼음’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쯤에서 시인이 제시하려는 ‘연못’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질문해 볼 필요가 있겠는데, 그것은 아마도 생의 의지를 얼어붙게 만드는 세계에 대한 비판과 동시에 여성성의 회복을 가리키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시인의 시선이 얼음 ‘안’에 집중돼 있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이겠죠. ‘오래전에 온 겨울’이 연못을 온통 얼어붙게 하고 있으나, 연못 안에서는 여전히 ‘물은/ 숨 쉬고 손가락 같은 물고기들이 움직이고’ 있습니다. ‘수련’ 또한 사라졌으나, ‘적갈색 잎과 검은 줄기’로 남아 ‘핏줄처럼 얼기설기/ 얼어붙은 연못을 부여잡고’ 있지요. ‘응고된 생각과 재갈물린 언어’ 또한 유사한 의미에서 쓰인 것이라 할 수 있겠는데, 이것은 모두 얼음이 녹으면 새롭게 재탄생할 것을 암시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마지막 구절은 참으로 의미심장하게 다가옵니다. 즉 ‘당신의’ 부드러운 ‘입김’, 당신 안의 여성성을 복원하는 것이 추운 세상을 건너갈 한 방법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시인은 그것을 ‘연못’이라는 여성성에서 찾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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