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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세영 희망웅상 홍보분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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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일인 듯 가슴이 아프고 억울하고 내가 아무것도 해결해줄 수 없는 것에 답답하기도 했다. 어머니의 슬픔이 내게도 훅 끼쳐와 때마다 그 감정이 드러났다 덮이기를 수없이 반복했다. 그 모든 슬픔의 시작은 사람이었다.
사람과 서로 주고받으며 살다 보니 사람에게 기쁨을 받기도 하지만 슬픔을 받기도 한다. 어머니에게 그녀의 삶의 이야기를 전해 들으며 ‘사람들과 무엇을 주고받으며 살아야 할까?’, ‘나는 누군가에게 무엇을 줄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슬픔을 주지 않는 것이 좋다는 것은 누구나 잘 이해한다. 우리는 슬픔을 주는 말이나 행동에서 나오는 부정적인 에너지는 자신과 곁에 있는 사람들 모두에게 해를 준다는 것을 안다.
그렇다면 ‘남이 내게 주려는 슬픔 또는 남의 슬픔을 받아들여야 하는가’는 좀 더 생각해볼 문제다. 흔히 고통과 슬픔은 나누면 절반이 된다고 하는데, 과연 그럴까? 단순히 생각하면 남의 슬픔을 안 받아들인다는 것은 남의 아픔을 모른 척하는 매정한 태도가 아닌가 여겨질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물에 빠진 사람을 도우려면 내가 함께 물속에 빠져서 허우적거려서는 안 되는 것처럼 아픔을 겪고 있는 사람에게 진정으로 의미 있는 도움을 주려면 우선 내가 그가 처한 어둠에서 벗어나 있어야 한다. 나의 어두운 마음으로 그의 어둠을 물리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엄밀히 생각해보면 우리에게 닥치는 고통과 슬픔은 각 사람의 몫이고, 남이 함께 나눠져 줄 수 없는, 각자가 져야 할 짐이다. 슬픔과 괴로움에 빠져 있는 이를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 사람이 그 상황을 스스로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뿐이다. 이것은 그가 느끼는 부정적인 감정에 함께 휩쓸려서 슬픔이나 고통을 같이 느끼는 것과는 다르다.
그럴 때 도움이 될 수 있는 것은 오히려 그이의 우울한 감정에 내가 같이 빠져들지 않도록 초연함을 유지하면서 그 사람이 스스로 어둠에서 벗어나 밝은 곳으로 나올 수 있도록 필요한 배려를 하는 사랑의 마음이 아닐까.
내가 사람들과 주고받고 싶은 것은 사랑이다. 우리는 자기 안에 있는 것을 남들과 나누며 산다. 내 안에 있는 것은 자연스레 흘러나가게 마련이며, 내 안에 없는 것은 주고 싶어도 줄 수가 없다.
사랑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내가 내적으로 얼마나 행복하고 충만한가에 따라 다르다. 아낌없이 줄 수도 있고, 때로는 아무것도 줄 것이 없을 수도 있는 것. 그렇기 때문에 항상 나 자신의 평화와 행복을 먼저 돌보는 것이 좋다.
어머니와 함께 편안하게 목욕을 하고 평화로운 산책을 하고 싶다. 내가 내 내면을 돌본 만큼 상대를 자유롭고 행복하게 해주는 건강한 사랑을 어머니에게 드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