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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시민신문

[천성산 베일을 벗다] 천성산에 꽃핀 고고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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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성산 베일을 벗다] 천성산에 꽃핀 고고 문화

양산시민신문 기자 입력 2015/11/17 10:53 수정 2015.11.17 10:49
양산이 품은 명산, 천성산①




↑↑ 신용철 양산시립박물관장
선사시대부터 천성산은 교통 요지이자 풍부한 산물로 사람들 생활터전으로 이용됐다. 천성산 일대에 인간생활 흔적이 고고학적 자료로 확인되는 것은 청동기시대부터다. 상북 소토리와 평산리(現 평산동)는 천성산 일대 고고 문화를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다.
↑↑ 「양산군읍지」 중 원적산 조선 후기, 채색필사본,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양산군읍지에 등장하는 천성산은 원적산으로 표시돼 있으며, 산 능선과 조선후기에 현존하던 금수암, 금봉암, 대둔사, 원효대 등 명칭이 자세히 기재돼 있어 원효대사 전설이 산 굽이굽이 전해지고 있다는 점을 찾을 수 있다.

천성산 동쪽 구릉 사면에 있는 평산리 유적에서는 기원전 5세기 전후에 형성된 청동기시대 주거지 7동이 확인됐다. 주거지 위치는 천성산 구릉 사면에 띄엄띄엄 배치돼 있어 가족중심으로 생활한 것을 알 수 있다. 유물로는 독모양토기, 반달돌칼, 간화살촉 등이 출토됐다.
↑↑ 간돌칼(磨制石劍) 청동기시대, 양산 소토리 출토, 길이 (右) 35.0㎝, 국립김해박물관 소장
돌을 갈아 만든 단검은 청동기시대를 대표하는 유물로 용도는 주로 베거나 찌르는데 사용한다. 그러나 양산 소토리에서 확인된 석검은 입자가 곱고 무른 니암혼펠스제를 사용하고 있다. 날을 사용한 흔적이 전혀 확인되지 않아 부장을 위한 의기용으로 만든 것이 특징이다.

청동기시대 주거지 위 같은 위치에는 삼한시대 취락이 형성되는데 마을 방어를 위한 환호시설을 갖춘 좀 더 발달한 모습을 나타내고 있어 천성산 일대 삼한시대 마을형성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

천성산 자락 서쪽으로 뻗은 낮은 구릉에 있는 소토리 유적에는 청동기시대 주거지와 무덤 공간과 통일신라시대 도로·조선시대 주거지, 가마터 등 다양한 흔적이 확인돼 천성산이 사람들 삶의 터전이 돼 온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주거지는 구릉 정상부와 사면에, 무덤은 구릉 정상부 근처에 위치한다.

천성산 남서쪽 구릉에 있는 호계동ㆍ산막동 유적에서는 지상식 건물지, 수혈, 토기가마 등 청동기시대부터 삼국시대까지 대규모 생활유적이 확인돼 선사시대 양산의 마을 복원과 지역 문화를 알 수 있는 기초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 적색마연토기(赤色磨硏土器) 청동기시대, 소토리 유적 출토, 높이(右) 13.0㎝, 국립김해박물관 소장
적색마연토기는 얇은 기벽에 붉은색 안료를 칠하고 윤이 나게 마연한 토기를 말한다. 홍도, 붉은간토기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려진다. 제작기법과 기형에서 일반적인 청동기시대 무문토기와는 확연히 구분되기 때문에 부장용ㆍ의례용으로 사용되는 것이 대부분이다.

특히 삼국시대 토기가마 유적은 양산 북정동 고분군을 비롯해 삼국시대 고분군과의 관계, 당시 토기 유통 등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라 할 수 있다.

주남리 도요지(현 주남동)는 동쪽 자락 사기점 마을 뒤쪽 구릉에 있는데 조선시대 분청사기와 백자 가마터가 확인돼 15세기 후반부터 16세기 전반 천성산 지역 도자문화 일면을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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