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악가 엄정행 음악길 조성사업 ↑↑ 박성진
본지 논설위원ⓒ
시의회 제동으로 추진 불투명
지역 출신 예술가 선양사업인 만큼
원만한 협의 거쳐 사업 추진 기대
양산시가 야심 차게 추진한 엄정행 음악길 조성사업이 첫 고비에서 좌초했다. 시의회가 시민 의견 수렴 과정 부족을 이유로 제동을 걸자 양산시가 자진해서 예산 편성을 포기하고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시는 최근 종합운동장 뒤 양산천 둑길 1.1km 구간에 지역 출신 성악가 엄정행 씨 이름을 딴 음악 길을 조성하기로 했다.
엄정행 씨의 대표적인 가곡과 다양한 노래를 들을 수 있는 음향시설을 갖추고 그와 관련한 조형물과 조명시설을 설치해 관광 인프라로 삼으려 했다. 여기에는 국비 5억원과 시비 10억원이 투입될 예정이었다고 한다. 이미 확보한 국비는 물론 사업 자체도 내년 추진이 불투명해졌다.
시의회 예산 심의에 앞서 열린 설명회에서 제동이 걸린 사유는 양산시의 일방적인 사업 추진이다. 양산시가 이미 한 달 전 삽량문화축전에서 시장이 직접 사업 발표를 할 만큼 사전 기획이 이뤄졌음에도 시의원들과 실무 협의를 선행하지 못했다는 것은 일방적 사업 추진 비난을 면할 수 없다 할 것이다. 나동연 시장의 의욕적인 사업 추진이 의회와 마찰로 제동이 걸린 것이 처음이 아니라는 사실은 짚고 넘어가야 할 사안이다.
시의회 반발도 단순한 여론 수렴 과정 누락에만 원인이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첫째는 예산 투입 사업에 대한 사전 협의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점이요, 또 하나는 엄정행 씨에 대한 지역사회 일부의 배타적 인식이 영향을 주지 않았는가 생각된다.
시의회는 시민의 대리인으로서 대우와 인정을 받기를 원하기 때문에 집행부와 힘겨루기가 발생하곤 한다. 나중에 허용해 주더라도 한 번 제동을 걸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예산 승인을 받기 위해서는 의회 의결이 필수적인 만큼 돈 문제를 쥐고 있는 것이 시의원의 가장 큰 무기인 셈이니까.
엄정행 씨 명성은 오래전부터 고향 동네에서보다는 전국적으로 더 알려졌었다. 이탈리아 등 성악 선진국 유학을 거치지 않은 토종 성악가로 전국적 명성을 얻은 성악가는 그가 유일하다. 양산 중부동에 있는 교육자 집안에서 태어나 양산중학교를 졸업한 엄정행 씨는 동래고와 경희대 음대를 나온 뒤 모교인 경희대에서 정년퇴직할 때까지 후진을 가르쳤다.
2008년 퇴임할 때까지 그는 음악밖에 모르고 산 사람이다. 지역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부족했던 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다. 뒤늦게 그것을 깨달은 그는 지역 후배 음악가를 통해 엄정행 콩쿨을 만들어 예술활동 지원에 나서고 있다.
인터넷 포털 사이트 인명사전에 엄정행 씨는 경남 양산 출신으로 나온다. 경희대 설립자인 고 조영식 박사가 직접 쓴 시에 김동진이 작곡한 ‘목련화’는 그의 대표적인 레퍼토리다. 그 외에도 그가 부른 보리밭, 선구자, 그리운 금강산 등은 그 시절 학생들의 애창곡이었다. 지금도 그의 미성을 듣고 싶어 하는 중년의 팬들은 많다.
그는 퇴임 후 바로 고향 양산으로 내려와 ‘엄정행 음악 연구소’를 설립하고 후진 양성에 들어가 음악 콩쿨을 지속하며 연우합창단을 만들어 공연하는 등 지역을 기반으로 하는 왕성한 예술 활동을 벌이고 있다. 이런 업적과 기여에 대한 보상으로 양산시는 2012년 엄정행 씨에게 시민대상을 헌정했다.
엄정행 씨 개인적 품성이나 과거 활동들이 문제가 됐다면 이미 3년 전 시민대상 심의 과정에서 모두 드러났을 것이다. 또한 그런 세세한 심의 과정을 통과하고 시민대상 수상자로 결정했다면 그 성과와 업적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런 뜻에서 이번 양산시가 추진한 엄정행 음악길 조성 사업은 의의가 있다고 생각한다.
1980~90년대를 풍미했던 음유시인이자 대중가수인 김광석을 기린 대구 김광석길은 이제 단순히 대중적 인기를 우려먹는 상술이 아니라 관광 아이템으로서 명성을 이어가고 있다. 통영의 청마문학관이나 목포의 난영공원은 모두 예술가의 이름을 관광 인프라로 재탄생시킨 명소들이다. 양산이 낳은 유명 예술가의 이름을 딴 산책로가 장차 인기 있는 관광 명소가 되지 못하라는 법이 있겠는가.
다만 양산시의 일방적인 사업 추진 행태는 앞으로 시정돼야 한다. 시 예산이 누구에게서 나온 것인가. 모두가 세금이라면 전주(錢主)가 시민인 셈이다. 아무리 좋은 사업을 하더라도 미리 전주와 의논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시와 의회 간 원만한 협의를 통한 사업 추진을 기대한다.